ADVERTISEMENT

58세 마케팅 전문가…삼성 첫 여성 사장 됐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1면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에서 첫 여성 사장이 배출됐다. 삼성그룹에서 오너 경영인이 아닌 내부에서 여성 사장이 발탁된 건 처음이다. 기술 인재는 이번에도 중용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0월 취임한 후 실시한 첫 사장단 인사에서다. 재계에선 한종희·경계현 두 대표이사를 유임시켜 글로벌 복합위기에 대응하는 한편 성별·국적을 불문하고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이재용식 인사 키워드’가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삼성전자는 5일 이영희(58) 디바이스경험(DX)부문 글로벌마케팅센터장을 글로벌마케팅실장 사장으로 선임하는 등 2023년 정기 사장단 인사를 발표했다. 이번 인사는 7명이 사장으로 승진하고, 2명은 업무가 변경되는 등 총 9명 규모였다. 회장, 부회장 승진은 없었다. 승진 규모는 2018년 10명(회장 1명, 부회장 2명, 사장 7명) 이후 최대다.

이영희 신임 사장은 삼성그룹에서 비(非)오너가 출신으로 최초로 여성 사장에 올랐다. 지금까지 삼성에서 여성 사장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 등 오너 경영인뿐이었다. 앞서 LG·SK도 최근 사장단 인사에서 비오너가 출신 첫 여성 사장(대표이사)을 선임한 데 이어 삼성에서도 ‘유리천장’이 깨졌다.

이 신임 사장 배출로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발언도 재조명되고 있다. 이 선대회장은 2011년 8월 여성 임원들만 따로 모아 오찬 간담회를 갖고 “여성은 능력도 있고 유연성까지 갖춰 경쟁에서 질 이유가 없다. 여러분들은 사장까지 돼야 한다”고 격려했다. 이 선대회장은 또 “여성이 임원으로 끝나서는 자신의 역량을 다 펼치지 못할 수도 있다”면서 “여성도 사장까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능력 있는 여성 인력에 힘을 실어주는 이 선대회장의 발언이 있은 지 11년 만에 여성 사장이 탄생한 셈이다.

이 사장은 그동안 삼성전자의 첫 여성 사장 후보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이다. 마케팅 전문가인 그는 유니레버코리아, SC존슨코리아, 로레알코리아를 거쳐 2007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전략마케팅팀 상무로 합류했다. 2012년 부사장으로 승진한 뒤 갤럭시 시리즈와 삼성의 글로벌 시장 브랜드 안착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았다.

지난달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 삼성전자는 브랜드 가치 877억 달러(약 125조원)로 평가받으며, 애플·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구글과 함께 3년 연속 세계 5위권을 지켰다.

이 사장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삼성전자 내 여성 사장 후보 1순위로 꾸준히 언급됐다. 삼성 관계자는 “단순히 여성이라는 상징성만 앞세워 사장에 임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면서 “끊임없이 능력과 성과를 검증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번 인사의 또 다른 키워드는 ‘안정 속 위기관리’였다. 한종희 부회장과 경계현 사장 2인 대표이사 체제는 그대로 유지했다. 회사 측은 “불확실한 대내·외 경영 환경에서 조직 안정을 도모하고, 미래 준비를 위한 과감한 변화와 혁신에 나서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또 50대 중반의 젊고 유능한 기술 인재를 전진 배치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 6월 유럽 출장을 마친 후 기자들과 만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라며 기술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이 회장의 기술 중시론이 반도체·통신 장비 등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인재 발탁으로 이어졌다.

김우준(54) DX부문 네트워크사업부 사장이 대표적이다.

기술, 여성, 안정 속 위기관리…이재용 첫 인사 키워드

김 사장은 최근 일본 NTT도코모 등과 5세대(5G) 이동통신 장비 공급을 확대하는 등 네트워크 부문의 성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회장은 5G를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꼽으며 그동안 직접 챙겨왔다.

DS부문에선 남석우(56) 글로벌 제조&인프라총괄 제조담당과 송재혁(55)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반도체연구소장이 나란히 사장으로 승진했다. 남 사장은 세계 최초로 20나노미터(㎚) D램을 개발해 2014년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받은 반도체 공정 개발·제조 전문가다. 서울대 박사 출신의 송 사장 역시 1996년부터 반도체사업부에 근무하면서 D램, S램, 플래시메모리 개발 업무를 맡아왔다. 향후 반도체 분야에서 ‘기술 초격차’를 구현할 인재로 꼽힌다.

백수현(59) DX부문 커뮤니케이션팀장(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했고, 박승희(58) 삼성물산 커뮤니케이션팀장(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해 삼성전자 대외협력(CR) 담당을 맡게 됐다. 두 사람 모두 언론인 출신으로 삼성의 대외 소통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이다. 반도체 마케팅 전문가인 양걸(60) 중국전략협력실 부실장 부사장은 삼성전자 중국전략협력실장 사장으로 승진했다.

전경훈(60) 네트워크사업부 사장은 DX부문 CTO 겸 삼성리서치장으로, 승현준(56) 삼성리서치장 사장은 DX부문 삼성리서치 글로벌R&D협력담당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삼성전자 측은 이번 인사에 대해 “핵심 사업의 미래 경쟁력 강화 의지를 확고히 하며 성과주의 인사를 실현했다”며 “역량과 성과가 있는 여성 사장을 선임해 여성 인재들에게 성장 비전을 제시하고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인사였다”고 말했다. 삼성은 조만간 부사장 이하 정기 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 내용을 확정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이번 삼성의 사장단 인사를 끝으로 재계 4대 그룹의 인사가 마무리됐다. 주요 대기업은 핵심 경영진의 인사 폭을 최소화하는 등 안정 기조 속에서 미래 준비에 나서는 모양새다. 불확실한 경영환경을 이끌어가기 위해 기업들은 큰 변화보다는 기존 장수에 한 번 더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