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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戰艦 '카레예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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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04년 2월 9일 인천 앞바다. 이곳에선 당시 동북아의 운명과 일본 제국주의의 열강화를 상징짓는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해전(海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사상 러.일전쟁으로 기록된 사건의 첫 전투가 바로 이곳 제물포 앞바다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치밀한 계산 끝에 본대는 뤼순(旅順)항에 정박한 러시아 해군함대에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순양함대는 제물포에 기항 중인 러시아 함정들을 공격했다. 이때 제물포에 기항해 있던 러시아 함정은 '바랴그'호와 '카레예츠'호였다. 이들은 일본의 장갑순양함 10여척의 공격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전멸'이냐 '항복'이냐 기로에 섰던 러시아 해군은 일본에 대한 항복보다 자폭(自爆)을 택해 전원 인천 앞바다에 수장됐다. 당시 이 해전은 뤼순항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묻혀 세계의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러.일전쟁 개막전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러시아 해군은 이 전투를 '제물포 해전'이라 부르며 요즘도 해군생도들에게 러시아 군인정신과 조국애의 장렬한 상징으로 가르친다. 또 한국과 수교한 후에는 매년 전투 해역을 찾아 꽃과 진혼음악을 바치며 장렬한 죽음의 기록과 역사를 배운다.

그런데 전함 '카레예츠'호의 카레예츠는 러시아 말로 '한국인'이란 뜻이어서 우리에겐 더욱 특별한 느낌을 준다. 어떤 연유로 당시 러시아 해군에 한국인이란 이름을 딴 배가 취역하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 전함 '한국인'호가 한국의 일제 강점을 초래한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맞서 해전을 벌인 러시아 배였고 선원들이 모두 수장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역사적 여운을 남기는 것은 틀림없다.

1989년 12월 러시아 해군은 '바랴그'호를 9천t급 최신형 미사일 순양함에 승계해 부활시켰다. 그리고 지난 8월 태평양함대사령부 소속 1천t급 대잠 초계함에 '카레예츠'호의 이름을 승계시켰다. 러시아는 또 인천시와 경기도에 당시 수몰된 장병과 제물포 해전을 추모하는 공원과 기념비를 건립하고 싶다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내년 러.일전쟁 1백주년 기념제에 바랴그호와 함께 한국을 찾을 계획인 카레예츠호.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1백년 만에 제물포 앞바다에 나타날 전함을 우리는 어떤 역사인식으로 맞아야 할 것인가.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