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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윤 대통령, 마거릿 대처가 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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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윤석열 대통령은 5월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영국 전시내각 때 처칠과 애틀리의 '파트너십'을 거론했다. 갓 취임한 대통령의 협치 의지가 주목받았다. 그러나 최근 노동계에 대한 강경 대응을 보면 윤 대통령의 롤 모델이 윈스턴 처칠에서 마거릿 대처로 바뀐 듯하다. 대처는 고복지·고비용·저효율의 '영국병(病)'을 과감한 개혁으로 돌파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가라앉던 영국을 서방 주요 국가로 다시 만들었다. 개혁 핵심은 기득권 노조와의 정면 대결이었다.

강성 노조와 정면 대결 선택 비슷
대처는 중산층 지지로 11년 집권
지지율 뒷받침돼야 개혁도 가능

1970년대 영국에서 노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1973~74년 탄광노조 파업은 에드워드 히스가 이끌던 보수당 정권을 무너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노조의 과도한 투쟁은 국민, 특히 중산층을 질리게 했다. '불만의 겨울'이라 불리던 78년 말~79년 초 공공부문 총파업 사태가 그 정점이었다. 기차·버스·지하철이 모두 섰다. 진료를 거부당한 환자가 죽어나갔다. 여론의 70%가 "노조가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답했다. 79년 5월 총선에서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압승한 배경에는 이런 노동계의 '패착'이 있었다.

(울산=뉴스1) 윤일지 기자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의 집단운송거부(총파업) 행동이 7일째 이어진 30일 오후 울산 남구 석유화학단지에서 조합원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2022.11.30/뉴스1

(울산=뉴스1) 윤일지 기자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의 집단운송거부(총파업) 행동이 7일째 이어진 30일 오후 울산 남구 석유화학단지에서 조합원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2022.11.30/뉴스1

화물연대 파업에 업무개시명령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한 윤 대통령의 뇌리에도 '한국병'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을 법하다. '법과 원칙'이야말로 새 정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유시장과 민영화 강조, 공공부문 축소, 낭비적 복지의 효율화 같은 정책 기조도 대처와 윤 대통령이 닮았다.

그러나 이미지가 겹친다고 정치 여건까지 비슷한 건 아니다. 총선에서 세 번이나 승리하며 11년 동안 집권한 대처는 전후 최장기 총리라는 명예를 안았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임기 1기 때는 산업구조 조정으로 실업률이 폭증하면서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졌다. 때마침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1982년)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재집권이 힘들 정도였다. 대처의 개혁 성과가 수치로 확인된 것은 임기 2기인 80년대 중반이 돼서였다.

윤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4년 반 남았다. 당장 1년4개월 뒤엔 정권 후반기의 운명을 가를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노동·연금·교육 등 '3대 개혁'을 과제로 꼽고 있다. 개혁이라는 게 반발은 눈앞이고, 성과는 더디기 마련이다. 개혁 성과를 총선 전략으로 내걸기 힘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그 과제를 마냥 미적대면 보수층의 지지마저 잃을 가능성이 있다. 딜레마다.

영국병을 치유한 대처의 업적은 크지만 그늘도 깊다. 2013년 대처가 사망했을 때 노동자의 도시 리버풀에서는 "마녀가 죽었다"는 환성이 터졌다. 죽음 앞에서도 풀리지 않은 증오다. 그래도 대처가 과감한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미들 잉글랜드'라 불리는 중산층의 확고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어떤가. 취임 6개월 현재 지지율은 30%대다. 당내 갈등, 인사 문제, 잇따른 태도와 말실수 등으로 지지층 다수가 이탈했다. 반대가 지지의 배를 넘는다. 돌아선 지지층 중 일부는 절대 비토(veto)가 되는 현상까지 관찰된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 회피, 언론에 대한 감정적 대응 등이 이런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내후년 총선에서 개혁의 '성과'보다는 여전히 개혁의 '필요성'을 앞세워 지지를 호소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상황에서 지지율마저 지지부진하면 어떻게 될까. 악재가 거듭돼도 지지율이 더 빠지지 않는 건 윤 대통령으로선 다행이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는 건 위험하다. 문재인 정부도 40% 콘크리트 지지에 만족하다 정권을 내줬다. '콘크리트'라는 말 자체가 탄력 회복성이 작다는 뜻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영국 노조가 대처를 도왔던 것처럼 지금 민주당은 당 대표 지키기에 올인하면서 윤 대통령을 돕는 형국이다. 그 반사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윤석열 정부는 더 위험해질지 모른다. 이제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봐야 하는 것에도 눈을 돌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