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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준예산 땐…月70만원 영아 지원, 5조 장애인 예산 스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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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준예산' 편성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 첫 예산안의 법정 처리시한(12월 2일)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다. 내년도 예산안을 놓고 여야가 극한의 대립을 이어가면서 올해 안 처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준예산은 회계 연도 개시일(1월1일)까지 예산안 심의가 확정되지 않으면 정부가 전년도 예산에 준해 잠정적으로 집행하는 예산을 뜻한다.

여야 강대강 대치에, 준예산 불안감

30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여당이 예산안 심의를 보이콧한다”며 “원안 아니면 준예산을 선택하라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이전, 경찰국 신설 예산 등을 민주당이 각 상임위부터 대대적으로 삭감하면서 여당에선 “대선 불복이 아니냐”며 버티고 있다.

우원식 국회 예결위원회 위원장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 등 조정 소위원회에서 심사를 하고 있다.   이날 국민의힘 의원들은 민주당 일방처리한 상임위예비심사의 재심사를 촉구하며 불참했다. 뉴스1

우원식 국회 예결위원회 위원장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 등 조정 소위원회에서 심사를 하고 있다. 이날 국민의힘 의원들은 민주당 일방처리한 상임위예비심사의 재심사를 촉구하며 불참했다. 뉴스1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고 해를 넘어갈 경우 준예산 편성이 이뤄진다. 헌법 54조를 보면 법률상 지출의무, 법률에 따라 설치된 기관이나 시설의 유지, 이미 예산으로 승인된 사업을 계속하는 경우에만 준예산 집행 대상이다.

저소득층 사각지대 확대 우려 

정부의 2023년 예산안 639조원 중 재량지출은 297조원이다. 법적 의무에 따른 사회보험 지출 등 의무지출을 제외하고, 정부가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편성하는 게 재량지출이다. 준예산 편성 시에는 이런 재량지출의 대부분이 막힌다. 당장 노인‧아이‧장애인‧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이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취약계층 사회안전망 강화를 목적으로 생계‧의료‧주거급여 등의 선정 기준을 완화하기로 했는데 준예산에는 반영되지 않아서다. 예컨대 생계‧의료급여의 주거재산한도를 1억7200만원(서울 기준)으로 올리는 내년도 예산안 계획이 무산되면 전국 4만8000가구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주거급여 지원 대상 확대도 연계돼 있어 준예산 편성 시 3만4000가구가 지원을 받지 못한다. 지난 정부에서 부동산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주거재산 기준을 넘어 지원 대상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대거 나타날 수 있다.

여기에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도 예산이 투입되지 않아 중단될 수 있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 SOC 예산으로 25조1000억원을 편성했다. 관급공사가 멈추면 일용직 일자리도 끊긴다. 연간 고용 규모가 82만2000명에 달하는 노인일자리도 멈춘다. 노인일자리는 자산이 충분치 않거나 소득이 없는 어르신들의 필수 생계수단이 돼왔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노인·보육·장애인 피해

1월2일부터 정부가 지원하는 어린이집 보육료나 장애인 시설 운영비도 끊긴다. 1조3000억원을 들여 만 0세 아동 양육 가구에는 월 70만원을, 만 1세 부모에는 월 35만원씩을 지급하기로 한 부모급여도 받을 수 없다. 정부는 내년도 장애인 지원 예산으로 5조8000억원을 책정한 상태였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준예산 상태에선 국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고, 한국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경기·성남 준예산 사태 경험

준예산 사태는 미국으로 따지면 연방정부 '셧다운'과 유사하다. 2016년 경기도 사례에서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도의회가 누리과정 예산 편성을 놓고 부딪히면서 2015년에 예산이 통과되지 못하고, 2016년 1월 28일에야 예산안이 통과됐다. 약 4주간 각종 복지‧취업지원 사업이 중단됐다.

그해 1월 말까지 장애인체육교실, 농아노인센터 운영 등 장애인 복지사업이 운영비가 없어 차질을 빚었다. 청소년 싱글맘‧무료이동진료사업 등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지원도 정지됐다. 특히 무료이동진료사업이나 취약계층 진료비 지원 등 보건 분야 예산 수십억원이 집행되지 않으면서 저소득층 환자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0일 서울 성동구청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0일 서울 성동구청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뉴스1

2013년엔 경기도 성남시에서 준예산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성남시장이었던 이재명 대표는 “다수당 보이콧으로 의회 파행이 장기화하면 의회 스스로 권한과 책임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전례 없는 일, 가능성은?

지금껏 중앙 정부에서 준예산이 편성된 적은 없다. 2013년과 2014년엔 1월 1일이 돼서야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한 적이 있지만, 마지노선은 지켜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야당이 초유의 예산안 단독 처리 가능성을 예고하고 나서면서 올해는 갈등이 차원이 다르다는 우려가 크다. 익명을 요구한 기재부 핵심 관계자는 “증액 동의권은 정부가 가지고 있어서 야당 단독 예산안 처리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여야 모두 부담이 큰 만큼 재정당국은 막판 타결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준석 교수는 “준예산으로 인한 피해는 상상하기 어렵다"며 "여야가 데드라인을 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 같은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지면 끝내 합의가 안 되거나 졸속 예산안이 국회 문턱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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