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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흘리고 한잔 재미 쏠쏠” 50년간 라켓으로 건강 지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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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호 30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21〉 인생 운동 테니스

1983년 5월 1일 제1회 대통령배 쟁탈 중앙행정기관 대항 공무원 체육대회 테니스 예선 통과 후 기념촬영을 했다. 뒷줄 왼쪽 넷째가 필자, 여섯째가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 [사진 김동호]

1983년 5월 1일 제1회 대통령배 쟁탈 중앙행정기관 대항 공무원 체육대회 테니스 예선 통과 후 기념촬영을 했다. 뒷줄 왼쪽 넷째가 필자, 여섯째가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 [사진 김동호]

올해로 시작한 지 50년을 맞는 테니스는 내 인생의 운동이다. 제대로 레슨도 받지 않고 ‘동네 테니스’로 출발했지만, 아마추어로서 나처럼 행운을 누린 테니스인도 없을 것이다. 1976년 영국 윔블던 경기와 2002년 롤랑가로스 프랑스오픈을 현장에서 관람했고, 83년엔 US오픈이 열리는 뉴욕의 내셔널 테니스장 센터코트에서 시합을 해봤을 뿐 아니라 94년엔 호주오픈이 열리는 멜버른 국립테니스코트에서 인증샷도 찍었으니 말이다.

70년대부터 80년대 전성기까지 그야말로 테니스에 미쳐 주말에는 코트에서 살다시피 했다. 전국 직장대회에도 주전 멤버로 여러 차례 출전했다. 80대 중반을 넘기면서 체력과 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져 50년 전 초보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허리와 무릎이 전과 같지 않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함께 치자는 전화만 오면 라켓을 들고나서니 ‘테니스 중독’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테니스 덕분에 지금까지 건강을 그런대로 지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문공부장관배 대회’ 창설해 매년 주관

1983년 US오픈이 열린 뉴욕 국립테니스센터에서 유엔본부직원과 테니스를 함께 쳤다. [사진 김동호]

1983년 US오픈이 열린 뉴욕 국립테니스센터에서 유엔본부직원과 테니스를 함께 쳤다. [사진 김동호]

테니스는 72년 1월 오래 살던 청량리를 떠나 강남구 신사동 ‘영동공무원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시작했다. 서울시에서 하급직원을 위해 신사동 네거리 언덕 위에 조성한 12평과 15평으로 이뤄진 12개 동의 아파트였다. 아파트로 올라가는 도로와 중앙의 마당 사이에 경사진 벽이 있었는데 테니스코트의 백보드처럼 ‘벽치기’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어느 날 아침 젊은 친구가 마당에서 그 벽을 향해 테니스공을 치고 있었다. 2~3일이 지나자 벽치기를 하는 청년이 두세 명으로 늘었고, 나도 나무 테로 된 일제 ‘후타바야’ 라켓을 구입해 합류했다. 그해 6월 서울시에서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 이남의 강남대로를 정비하면서 아파트로 올라오는 길과 마당까지도 포장해줬는데, 그 마당이 꼭 테니스코트 한 면에 해당했다.

벽치기를 하던 김종형·김계성·안극수 등 여덟 명이 모여 마당에 테니스코트를 만들고 ‘영동공무원아파트테니스클럽’(영공클럽)을 결성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테니스를 한 뒤 출근했고 주말에는 코트에서 살았다.

74년 9월 8일 효장테니스코트에서 열린 제4회 서울시장기 쟁탈 테니스대회에 처음 참가해 3등을 했다. 주부들이 도시락을 싸 와서 응원했고 아파트 마당에서 밤새 자축모임을 했던 게 엊그제 같다. 76년 제7회 대회에서도 3위를 했지만, 그 뒤 프로선수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출전을 포기했다.

창설 멤버인 김종형은 아르헨티나에서, 김계성은 과테말라에서 각각 타계했지만 조금 뒤에 참여한 김종관·김중조·김인수·김진우·김성간·권석태·김태영·민태기·유태엽·윤기웅 등은 지금도 일 년에 한 번 부부 동반으로 만나고 있다.

나의 테니스 열기는 직장인 문화공보부로 이어졌다. 보도국장을 맡고 있던 74년 4월 14일 문공부 테니스클럽인 ‘문정회’를 결성해 창립대회를 열었다. 75년 ‘총무처 장관배 부처대항 테니스대회’가 열리면서 그해 3등, 79년 준우승을 각각 했다.

그때만 해도 각 신문·통신사 편집국장·주필 등 간부 대부분이 테니스를 좋아했다. 나는 주말이면 각 언론사와 테니스 친선경기를 하면서 우호를 다졌다. 특히 합동통신·동양통신과는 함께 정기적으로 경기하면서 합동통신의 유승범 국장, 이재전 부국장, 송용식·김영일 부장과 동양통신의 임철규 국장, 갈천문·하순오·황해성 부장과 친해졌다. 동아일보의 권오기 국장과 김진현 논설위원, 조선일보의 신동호 국장을 비롯한 많은 언론인과 테니스를 함께 했다.

1980년 홍릉 문공부 테니스코트 개장식. 앞줄 왼쪽부터 필자(기획관리실장). 이광표 장관, 김은호 차관, 유운소 문화재관리국장. [사진 김동호]

1980년 홍릉 문공부 테니스코트 개장식. 앞줄 왼쪽부터 필자(기획관리실장). 이광표 장관, 김은호 차관, 유운소 문화재관리국장. [사진 김동호]

80년 8월 기획관리실장을 맡으면서 홍릉 세종대왕기념관 안에 4면의 직원 전용 테니스코트를 만들고 이곳에서 봄·가을에 ‘문공부장관배 직원테니스대회’를 열었다. 매회 120여명이 모였으며 멀리 경주박물관과 금산 칠백의총 직원들도 참가했다.

76년 5월 2일 기존의 언론사 기자 중심의 ‘펜클럽대회’와는 별도로 ‘문화공보부장관배 언론기관 테니스대회’를 창설해 매년 이를 주관했다.

76년 영국 공보부(IOC) 초청으로 3주간 현지를 방문했는데, 6월 29일 런던에 도착하자 마침 윔블던경기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지하철에 포스터가 도배되다시피 했고, TV는 온종일 경기를 중계했다.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초청기관인 공보부는 물론 주영 한국대사관과 공보관, KBS 특파원 등 여러 곳에 알아봤지만 이미 4~5개월 전에 매진돼 공식적으론 불가능했다. 7월 2일 금요일 오전 일정이 끝나자마자 코트라도 구경하려고 전철로 사우드필드의 윔블던 파크로 향했다.

당시 센터코트에선 체코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를 꺾고 올라온 미국의 크리스 에버트와 영국의 웨이드 선수를 물리치고 올라온 호주의 이본 쿨리(예명:굴라공)의 여자단식 결승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센터코트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남은 표’를 파는 사람을 만나 입장권을 구할 수 있었다. 에버트가 6:3, 4:6, 8:6으로 신승했지만, 내용과 매너 등 모든 면에서 윔블던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의 하나로 기록된 빅게임이었다. 귀국 뒤 ‘테니스저널’ 9~10월호에 참관기를 연재했다.

다음날인 토요일은 경기 마지막 날로, 남자단식 결승이 있었다. 아침 일찍 윔블던 파크로 갔다가 ‘남는 표’를 구했다. 루마니아의 일리 나스타제 선수와 스웨덴의 비외른 보리 선수의 결승전과 여자복식, 혼합복식 결승전 세 경기를 관람했다. 남자단식 결승전에선 비외른 보리가 예상을 뒤엎고 3:0 으로 우승했고, 그 뒤 연달아 다섯 번을 제패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2년 5월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한국영화가 칸에서 처음 수상한 쾌거였다. 시상식 다음날나는 파리에 갔다. 프랑스 거장인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과 지금은 고인이 된 피엘 리시앙과 저녁을 함께한 뒤 다음날 귀국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식당 ‘우정’에 갔다가 우연히 한국 테니스 대표팀의 주원홍 감독 일행을 만났더니 이형택 선수가 다음날 오전 프랑스오픈 1회전에 출전하는데 관람하겠느냐고 물어왔다. 주저 없이 가기로 하고 입장권을 받았다.

프랑스오픈 이형택 경기 다 못 보고 귀국

1983년 4월 3일 문화공보부 직원 테니스대회. 앞줄 왼쪽 여덟째가 필자. [사진 김동호]

1983년 4월 3일 문화공보부 직원 테니스대회. 앞줄 왼쪽 여덟째가 필자. [사진 김동호]

다음날아침에 체크아웃하고 짐을 호텔에 맡긴 뒤 전철로 경기가 열리는 롤랑가로스로 달려갔다. 이형택 선수는 독일 선수와의 대결에서 첫 세트는 내줬지만 둘째 세트에선 앞섰는데 비가 와서 경기가 두 번이나 중단됐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경기장을 나와 귀국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이형택 선수는 아깝게 탈락했다.

8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한 달간 미국에 갔을 때였다. 5월 1일 뉴욕에서 노스캐롤라이나로 향하는 도중 US오픈이 열리는 뉴욕의 내셔널 테니스장의 센터코트에서 유엔 대표부 간부와 한 게임을 하고 떠났다. 94년 호주를 방문했을 때는 호주오픈이 열리는 멜버른 테니스코트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4대 메이저대회 현장에 가본 것은 큰 행운이었다.

지난 50년간 여러 테니스클럽과 인연을 맺고 많은 동호인을 만났다. 90년대엔 서초동의 양재테니스코트가 개장하면서 매주 화요일 오후 대한제분 이희상 회장이 이끄는 화동회에서 고교 후배들과 어울렸다. 양재코트가 폐쇄되면서 10여년간 이어 가던 테니스 모임은 중단됐지만 부부동반 송년 모임은 매년 이어가고 있다.

92년 홍릉 문공부 코트가 영화진흥공사 사옥이 들어서면서 없어지자 주말에 중곡동 국립정신병원 코트에서 이성근 회장이 이끄는 우정회 멤버들과 합류했지만, 이 모임도 병원 신축공사로 중단됐다. 그 후 잠원동 실내코트에서 이창우 총무가 이끄는 얼리버드 클럽에 가입해 매주 일요일 아침 6~8시 테니스를 함께해 왔다. 그러다 10여년을 함께 운동하던 얼리버드 클럽이 5년 전 잠원동에서 고척동으로 코트를 옮기면서 거리가 너무 멀어 아침 운동을 포기하게 됐다.

2~3년 테니스를 중단하다 재작년 11월 예장로타리클럽의 최영미 회우의 소개로 박병관·이대훈 회장이 이끄는 첨일회에 가입해 지금도 매주 금요일 오후 고교 18년 후배들과 테니스를 함께한다. 가끔 수요일 아침에 용마폭포공원 테니스코트에서 우정회 멤버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점심 약속이 없는 일요일 아침엔 대학 27년 후배인 얼리버드 멤버 출신 서을오·최유리 이화여대 교수 부부와 그보다 7~8년 연하인 천수현 부부 및 한성엽과 양평 강하면의 테니스코트에서 만난다.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지만 테니스는 무엇보다 ‘땀 흘리고 맥주 한잔 들이키는’ 재미가 쏠쏠해서 좋다. 특히 남녀노소, 상하 구별 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지난 50년간 테니스를 통해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과 친해질 수 있었고 특히 젊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추억이고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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