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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예산 따내려 전방위 로비, 3당 원내총무 모임 주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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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호 24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20>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1984년 5월 1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기공식이 열렸다. (앞줄 왼쪽 셋째부터) 이해원 국회문공위원장, 이진희 문공부 장관, 전두환 대통령 부부. [사진 김동호]

1984년 5월 1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기공식이 열렸다. (앞줄 왼쪽 셋째부터) 이해원 국회문공위원장, 이진희 문공부 장관, 전두환 대통령 부부. [사진 김동호]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남다른 애정이 있다. 1969년 설립을 제안해 채택됐고, 12년 뒤인 81년부터는 신축과 부지 선정에 깊이 관여했으며 특히 전방위 로비로 건립예산을 확보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69년 4월 10일 신범식 문화공보부(문공부) 장관이 부임했을 때 나는 기획관리실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모시고 있던 박종국 행정관리담당관이 69년 5월 6일 공보국 국내과장으로 옮기면서 그달 15일 나와 최종채 사무관을 국내과로 발령낸 뒤 새로운 제도의 창안을 주문했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박종국 과장은 32년생으로 나보다 5년 연상이었고 총기가 넘칠 뿐 아니라 통솔력도 뛰어났다. 나중에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사무총장을 맡아 건설을 주도했다. 그의 부인 이법록은 나와 서울대 법대 동기다. 국내과로 발령받은 최종채 사무관은 전통문화분야를, 나는 현대문화 분야를 각각 맡았다.

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역대 대통령상 수상작품은 물론 중요한 현대미술작품들을 미술관이 아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래서 외국 사례들을 수집했고 이를 토대로 ‘국립현대미술관’ 창설 계획을 만들어 보고했다. 그 제안이 채택되면서 기구 및 정원(안)과 운영계획, 연간 소요예산 등을 만들어 총무처·경제기획원 등 관계부처와의 협의를 거쳤다. 그 결과 69년 8월 23일 국립현대미술관 직제가 제정, 공포됐다. 10월 20일 경복궁 내 청와대와 인접한 미술관 건물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현판식이 열렸고 경복궁 안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은 73년 7월 5일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사했다.

현대미술관 건립추진위 부위원장 맡아

1985년 11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 상량식. [사진 김동호]

1985년 11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 상량식. [사진 김동호]

10여 년이 흐른 80년 기획관리실장을 맡게 되면서 또다시 국립현대미술관과 인연을 맺게 됐다. 80년 10월 2일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국전’ 개막식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은 미술계 인사들의 건의를 받고 ‘상설야외조각장을 갖춘 현대미술관 건립’을 지시했다. 오늘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조성될 수 있게 한 단초였다.

81년 4월 23일 나는 이광표 장관과 함께 청와대로 올라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80년대 새 문화정책’을 보고했다. 이 계획(안)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건립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미술관 위치는 중앙청이나 덕수궁이 아닌 강남으로 정하되, 졸속을 피하고 50~100년을 내다보면서 조성할 것’을 지시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81년 7월 20일 김은호 차관을 위원장으로 현대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기획관리실장인 나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윤탁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세중 서울대 미대 교수, 이경성 홍익대 미술관장, 임영방 서울 교수, 윤일주 성균관대 교수, 지철근 서울대 공대 교수, 김원 건축가, 이상연 서울시 부시장을 건립추진위원으로 위촉해 그해 9월 9일 문공부 회의실에서 1차 회의를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소위원회를 구성해 미술관장이 위원장을, 김원 건축가가 부위원장을 맡았고 김수근 건축가가 대표로 있는 ㈜공간연구소에 ‘마스터플랜’ 작성을 의뢰했다.

1985년 11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 상량식에서 경과를 보고하는 필자(당시 문공부 기획관리실장). [사진 김동호]

1985년 11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 상량식에서 경과를 보고하는 필자(당시 문공부 기획관리실장). [사진 김동호]

이와 병행해 국립극장·국립현대미술관·국립영화제작소의 장을 일반직 공무원이 아닌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나는 세 기관의 장을 일반직과 별정직을 선택적으로 임용할 수 있도록 문공부 직제를 개정했다. 이에 따라 7월 2일 세종문화회관 커피숍에서 연극연출가 허규를, 7월 3일엔 홍익대 이경성 박물관장을 각각 만나 취임승낙을 받았다. 7월 4일엔 서울예전 교수로 고교선배인 김기덕 감독을 만나 국립영화제작소 소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김 감독은 고사했다. 그 결과 8월 18일 자로 국립극장장에 허규 연출가가,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이경성 교수가 임명되었고 국립영화제작소장에는 엄정흠 이사관이 유임됐다.

82년 4월 ㈜공간연구소는 마스터플랜을 통해 전시공간, 수장고, 사무관리 및 부속시설을 포함한 건평 1만1500평의 미술관과 야외조각장을 갖춘 현대미술관 건립계획을 마련했고, 남서울대공원, 덕수궁, 구 중앙청 경내를 후보지로 추천했다. 5월 21일 이진희 장관이 부임한 뒤 7월 20일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남서울이나 더 나아가 영호남지역에서도 접근이 쉬운, 전국의 중심지인 대전까지 나아가 신축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부지선정을 위해 서울 남쪽으로 과천, 수원, 대전과 계룡산 일대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을 수원 이남에 건설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초기단계부터 거론됐던 남서울대공원과 남태령을 1, 2안으로, 그리고 유성 복룡리 동산을 3안으로 하여 9월 30일 대통령에게 보고한 결과 남서울대공원으로 결정됐다.

다음 과제는 설계자 선정이었다. 10월 29일 개최된 추진위원회 제5차 회의에서 김수근·김태수·윤승중 3인을 선정한 뒤 12월 4일 열린 제5차 회의에서 김태수의 제안을 확정했다. 그동안 추진위원장은 김은호 차관에서 82년 1월 6일 허문도 차관으로 교체됐다. 위원장은 그 뒤 준공·개관 때까지 박현태·김윤환·최창윤으로 계속 바꾸었지만 나는 부원장을 계속 맡았다.

84년도 예산에 국악당 건립비 54억원과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예산 100억원을 요구했지만, 국악원 예산만 정부예산(안)에 포함됐고 현대미술관은 반영되지 못했다. 그래서 정기국회가 개원하자 국회를 상대로 예산 확보를 위한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 당시 고교 또는 대학이나 공무원 선배, 그리고 언론계 출신 국회의원들이 국회문공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대거 포진해 여건은 좋았다.

64년 국전 서예 입상, 현대미술도 심취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전경. [사진 김동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전경. [사진 김동호]

문공위에 여당인 민정당의 이해원 위원장과 이대순 간사는 서울대 법대 선배였고 민한당의 손세일 간사도 언론계 출신이어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문공위에는 가깝게 지내던 남재희·이영희·이낙훈·최창규·임재정 의원들이 있었다. 나는 문공위에 업무현황 및 예산 보고를 하면서 현대미술관 건립비 신규 책정을 요청했고, 문공위는 이를 받아들여 현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신규 예산책정을 예결위에 건의하기로 의결했다.

때마침 김종호 예결위원장은 법대 선배였고 간사를 맡고 있던 이자헌 의원은 서울신문 정치부장과 편집국장 출신이라 친했다. 당시 예산안은 예결위를 거쳐도 각 당 원내총무간의 협상으로 최종 마무리되는 일이 많았다. 마침 집권당인 민정당 원내총무는 경기고 동기로 ‘절친’인 이종찬 의원이었고, 한국국민당 이동진 원내총무와도 친했다. 나는 이종찬 원내총무를 통해 이진희 장관이 초대하는 형식으로 예산심의가 막바지였던 11월 25일 저녁 7시 30분 ‘정이’라는 한정식집에서 민한당의 임종기 원내총무를 포함한 3당 원내총무들과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선 정국 교착을 풀기 위해 이진희 장관이 3당 원내총무의 저녁 모임을 주선한 것처럼 보도됐지만, 실상은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예산확보를 위해 내가 주선한 자리였다. 국회가 마지막 단계에서 정부의 ‘동의’를 구할 때를 대비해 문희갑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에게도 부탁해뒀다.

나는 이진희 장관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대국회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 그 결과 국회에서 신규 사업으로 국회도서관 건립 설계비 10억원과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설계비 10억원 등 단 두 건만이 11월 31일 새벽 2시에 예결위원회 계수조정소위를 통과했다. 이는 12월 2일 오전 10시에 개회한 예결위 전체회의와 오후 2시에 소집된 국회 본회의의 의결을 거쳐 확정됐다. 나는 문공부나 영화진흥공사, 부산국제영화제의 예산 확보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처럼 전방위로 뛰어다닌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83년 11월 4일 김세중 서울대 미대 교수가 이경성 관장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나는 김 관장이 부임하자 84년 7월 24일 문희갑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을 후암동의 카페 ‘미림’에서 함께 만나 소개시켰다. 그 이후 이곳에서 자주 만나 술자리를 함께하면서 문 실장(85년 7월 차관으로 승진)과 김 관장의 교분이 두터워졌다. 김 관장의 노력으로 현대미술관 건축예산은 85년에 80억원, 86년에 잔여 100억원을 확보함으로 조기에 준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국립현대미술관은 84년 5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85년 11월 15일 상량식을 각각 열었으며 86년 8월 25일 준공, 개관했다.

나는 64년 제13회 국전 서예 부문에 입상했을 정도로 서예를 좋아했지만, 해외에 갈 때마다 원근을 가리지 않고 미술관을 찾으면서 현대미술에도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대미술관에 근무하고 싶다는 꿈과 미술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둘 다 이루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록 실현될 수는 없어도 꿈과 희망을 갖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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