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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미·중 사이 한국, 선택의 시간은 지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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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제훈 인천대 교수·아시아경제공동체재단 이사장

박제훈 인천대 교수·아시아경제공동체재단 이사장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러시아가 핵 사용을 위협한 데 이어 북한도 선제 핵사용을 법제화했다. 인류 생존이 걸린 전 지구적 위협, 즉 글로벌 생존적 위협(Existential Global Threats)이 화두가 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중요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 지역 내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을 위한 해방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식민지에 대한 침공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시각이 맞서 있다. 비교경제학의 대가인 미 버클리대의 제라르드 롤랑 교수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롤랑 교수는 지금의 복잡한 국제정세를 분석하기 위해 제국(Empire), 국민국가(Nation State),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개념 틀을 제시했다. 그는 국제법을 무시하고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추진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21세기의 제국으로 규정하고 중장기적으로 제국은 쇠퇴할 것으로 봤다. 그 대신 초국가적 기구를 만들어 제국에 대항하는 중소 규모의 민주주의 국가들의 다자간 연대가 힘을 얻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힘에 의한 현상변경 추구 중·러
민주주의 국가 다자연대와 대립
한국, 민주블록 기술우등국 돼야
기술발전의 국가 거버넌스 시급

이 분석 틀로만 보면 중국은 종교나 이념 대신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팽창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과거 다른 제국과 구분된다. 중국 같은 대국이 대만 통일을 주장하고 민족주의적인 국민국가처럼 행동할 경우 과거 나치 제국처럼 주변국이나 전 세계에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미·중 간 전략 경쟁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미·중 경쟁의 승자를 알기 위해서는 경쟁의 핵심인 4차산업 기술 혁명에서 누가 이길지 먼저 분석해야 한다.

18세기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진행된 1차 산업혁명처럼 4차 산업혁명도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양산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를 초래하는 혁명이되고 있다. 20세기에 진행된 세계화는 주로 하층 노동자들의 소득을 낮추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21세기에 등장한 플랫폼 기업과 인공지능(AI)은 중간 및 고학력층의 소득까지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평등과 양극화를 가속한 것이다. 미국에서 포퓰리즘이 득세한 근저에는 이런 양극화가 자리 잡고 있다.

중국 시진핑 체제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형성된 자본가층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양극화 및 불평등 해소를 명분으로 공동부유를 내세우고 있다. 최근 시진핑의 3연임 성공과 장기집권체제 구축으로 중국은 정권의 우선순위를 미국과의 체제 경쟁보다는 공산당 및 일인 지배체제의 공고화에 두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미·중 경쟁의 관건은 누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면서 경제 성장을 지속하느냐에 있다. 중국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불평등 해소에는 어느 정도 성공할지 몰라도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지만, 러시아로부터의 가스·원유 등 기존 화석연료를 값싸게 공급받는 구조에 안주할 경우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에너지 혁명에서 미국에 뒤처지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글로벌 공급망 구조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가치체계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 미국·유럽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블록과 중국·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 블록, 그리고 인도·남미·아프리카 등 제3의 블록으로 나뉠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포괄적 가치체계에 따라 나뉘지만, 실은 기술 및 공급망 구조에 따른 경제적 실리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 제3세력의 향방도 결국 어느 쪽이 경제면에서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느냐에 있을 것이다.

한국의 선택은 어디인가. 우선 정치·안보 면에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 미국과의 협력은 이미 선택의 문제를 넘어섰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북한이 중국·러시아로 확연히 기울고 있는 마당에 과거처럼 중국과 미국 사이의 줄타기란 불가능하다. 기술·경제 면에서 본다면 한국은 민주주의 블록 내 4차 산업혁명의 우등생이 돼야만 한다.

반도체·배터리뿐만 아니라 에너지 혁명에서도 승기를 잡아야 한다. 특히 수소 경제 생태계 조성에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글로벌 에너지 정책의 대가인 미 컬럼비아대의 줄리오 프리드만 교수의 주장처럼 수소 경제는 향후 저렴한 에너지 비용으로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올 국가 간 혹은 국가 내 양극화 심화를 해소하는 핵심 방안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생산력 즉 기술 또는 경제가 생산관계 즉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봤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될 것은 기술개발에 앞선다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 발전을 뒷받침할 국가의 거버넌스 구조를 어떻게 빨리 만들어 내느냐다. 친환경적이면서 불평등 완화적인 기술 개발을 촉진하면서, 양극화 같은 부정적 요소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정치·사회 거버넌스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선도국가 한국의 과제다.

박제훈 인천대 교수·아시아경제공동체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