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본격화되면서 민주당이 거리의 정치를 시작했다. 이 대표의 최측근 정진상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이 19일 구속되자, 친명(친이재명·親明)계 야권 의원 7명이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연단에 올랐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선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에 당 전체가 매몰되면 안된다는 반발도 나오고 있어 여야의 충돌뿐 아니라 야권 내부의 논란도 가열되는 모양새다.
친명계 의원들이 거리로 나선 건 법원이 정 실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한 지 단 15시간 만이었다. 민주당 의원 6인(안민석·강민정·김용민·유정주·양이원영·황운하)과 이 대표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민형배 무소속 의원은 19일 저녁 6시쯤 서울시청 인근에서 열린 촛불 집회 연단에 올라 “야당 죽이기 골몰하는 윤석열은 물러가라”, “사건조작 정치검찰 해체하자”는 구호를 외친 뒤 마이크를 잡았다. 그간 일부 민주당 의원이 개인 자격으로 촛불집회에 참석한 적은 있었으나, 무더기로 정권 퇴진 집회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국정조사 수용 ▶윤 대통령 사과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파면 같은 ‘이태원 참사’ 관련 요구를 펼치면서도, 동시에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발언도 이어갔다. 유정주 의원은 “윤석열 정부는 ‘인간 사냥’을 멈춰라. 멈추지도, 반성하지도 않겠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고 했고, 민형배 의원은 “10·29 (이태원) 참사 진짜 주범 윤석열은 책임지라”고 외쳤다.
참석 의원 중 최다선(5선)인 안민석 의원은 “윤석열 정권은 MB(이명박) 정권보다 사악하고, 박근혜 정권보다 무능하다”고 외쳤다. 그러면서 “오늘 저와 함께 무대에 오른 의원들은 민주당 지도부가 촛불 광장으로 나오기 전에 선도적으로 자발적으로 촛불광장에 나온 용기 있는 초선들이다. 오늘 이 시간 이후 저희와 여러분들은 한 배를 탈 것”이라며 향후 장외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김용민 의원은 집회 다음날인 20일에도 “(국민의힘은) 탄핵으로 끝난 박근혜 정부보다 윤석열 대통령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되돌아보라. 역사에 죄를 짓지 않으려면 국민들의 퇴진행렬에 동참하길 바란다”고 페이스북에 적으며 공세를 이어갔다.
이 대표 본인도 “유검무죄(有檢無罪), 무검유죄(無檢有罪)”라는 표현을 쓰며 검찰 수사를 ‘조작’으로 규정했다. 그는 19일 오전 “저의 정치적 동지 한 명이 또 구속됐다”며“조작의 칼날을 아무리 휘둘러도 진실은 침몰하지 않음을 믿는다”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임오경 민주당 대변인도 논평에서 “검찰 독재 정권의 야당 파괴 공작에 총력으로 맞서 싸우겠다”며 “표적과 결론을 정해놓고 없는 죄를 있는 것으로 만드는 수사가 정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野지도부, 장외투쟁 선 그었으나…‘李 방탄법’ 시동
강경파가 열어젖힌 장외투쟁에 일단 당 지도부는 선을 그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20일 국회에서 소속 의원들의 정권 퇴진 집회 참석에 대한 질문을 받고 “개별 의원들의 정치적 행동일 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 대표를 조여오고 있는 검찰 수사망에 대해선 박 원내대표도 강하게 반발했다. 박 원내대표는 “정 실장은 지난해 대선 경선 때 함께 일했는데, 결코 검찰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라는 게 제 확신”이라며“검찰이 무도하게 일방적 진술에만 의존하는 처리 방식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원내지도부는 169석의 의석수 우위를 앞세워 ‘법 왜곡죄 신설’ 같은 대응조치도 취한다는 계획이다. ‘법 왜곡죄’는 검사·판사가 부당한 목적으로 법을 왜곡되게 적용해 당사자 일방을 유· 불리하게 했을 경우 처벌하는 법안인데, 여당에선 “이재명 방탄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도부 소속 의원은 “칼끝이 이 대표를 겨눠오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 대표를 위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한동안 당력을 주력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비명계 “당 지도부에 대한 공개 반발 임박”
그러나 민주당 일각에선 친명계의 격한 반발과 거리를 두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비명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제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 대응과 관련해 당의 방향타를 확 꺾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서서히 퍼지고 있다. 이 대표의 측근에 불과한 정 실장과 김 부원장에 대한 방어에 깊이 발을 담글 경우, 향후 수사나 재판 결과에 따라 민주당 전체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진 의원은 이날 중앙일보 통화에서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만 해도 ‘대선 정치 자금 수수’라는 혐의와 당사에 대한 무리한 압수 수색 때문에 당이 일차적으로 방어했지만, 정 실장은 개인 뇌물 혐의라 이제부턴 당이 나서는 게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부 강경파 의원들이 거리로 나가 당의 사법리스크 대응 투쟁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건 아주 우스운 꼴”이라며 “출구전략을 남겨야 하는데, 빠져나갈 구멍조차 틀어막고 있다”고 했다.
계파 성향이 옅은 재선 의원도 “강경 투쟁 모드는 애당초 친명계 일색으로 꾸려진 당 지도부의 태생적 한계”라며 “민주당이 일제히 불나방이 된 모습이라 참담할 뿐”이라고 했다. 한 수도권 비명계 의원은 “정 실장 구속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당내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다. 당 지도부에 대한 공개 반발이 아주 임박한 상황”이라며 친명계와 비명계의 대립이 임박했다는 관측을 내놓았다. 구속당한 정진상 실장과 김용 부원장의 당직 유지 문제가 당장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