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맘에 들면 짓게"…괴짜 김동길이 만들어낸 '19평 명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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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에 위치한 김옥길 기념관. 고 김동길 교수 자택 앞마당에 지었다. [사진 아르키움]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에 위치한 김옥길 기념관. 고 김동길 교수 자택 앞마당에 지었다. [사진 아르키움]

지난달 5일 별세한 고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1928~2022)가 남긴 마지막 당부는 사회에 큰 울림을 안겼다. 장례식ㆍ추모식을 일체 생략하고, 시신은 연세대 의료원에 기증해 교육에 쓰게 하며, 집은 이화여대에 기증했다. 민주투사에서 보수 논객에 이르기까지 “이게 뭡니까”라며 거침없이 직언(直言)하던 김 교수다운 작별인사였다.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김 교수 자택 앞마당에 세운 건물 #외환위기 극복하고 건축상 휩쓸어 #괴짜 건축주가 만들어낸 명작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김옥길 기념관’에 조촐하게 차려졌다. 김 교수가 1947년부터 살아온 자택 앞마당에 지은 19평(건축면적 62.64㎡) 작은 건물이었다. “300년 가는 집을 지었다”며 김 교수가 살아생전 아끼던 공간이다. 그는 자택과 함께 이 건물도 이대에 기증했다.

건물을 설계한 이는 김인철 건축가(아르키움 대표)다.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에 설계를 시작해 1998년에 완공한 이 건물은 당시 한국건축문화대상, 서울시 건축상, 건축가협회상, 아시아태평양건축상 등 각종 건축상을 휩쓸었다. 외환위기를 딛고 지어진, 2층 규모의 작은 건물이 이룬 이례적인 성과였다.

지난달 7일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 기념관에 마련된 故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빈소의 모습. [뉴스1]

지난달 7일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 기념관에 마련된 故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빈소의 모습. [뉴스1]

그 비결은 건물 입구에 있는 현판에서 엿볼 수 있다. 건축주ㆍ설계자ㆍ시공자의 이름과 함께 ‘정성과 솜씨를 들인 사람들’이라며 32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김 교수는 작업자 한 명도 허투루 대하지 않았다. 현실정치에서는 ‘직언왕’이었지만, 공사현장에서만큼은 일절 관여하지 않고 전문가를 믿고 맡겼다. 그 결과 대한민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현장 작업자들은 똘똘 뭉쳐 예술작품과도 같은 건물을 완성했다. 김인철 대표는 “김옥길 기념관이라는 작은 건물에서 했던 건축적인 실험이 성공한 덕에 이후 나의 건축을 자신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의 김인철을 있게 한 프로젝트였다”고 전했다. 김 대표가 소회한 당시 건물의 건립과정과 남달랐던 건축 의뢰인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김옥길 기념관 입구에 있는 현판. 작업자 이름을 모두 새겨넣었다.  [사진 아르키움]

김옥길 기념관 입구에 있는 현판. 작업자 이름을 모두 새겨넣었다. [사진 아르키움]

“자네 마음에 들면 짓게”라던 별난 의뢰인

1996년 김 대표가 이화여대 후문 동네에 네 동짜리 다가구 주택을 설계해 막 공사할 참이었다. 소위 다가구 건물이라면 벽돌 건물이 흔하던 시절에, 지하를 파고 콘크리트를 단단히 친 공사현장이 낯설었는지 동네에서는 “벙커를 짓는다”며 소문이 났다. 어느 날 인부들이 김 대표에게 말했다. “김동길 교수 같은, 콧수염을 기르신 분이 현장을 한참 구경하다 가셨어요.” 김 교수의 자택이 지척거리었다. 이후에도 콧수염 어르신은 몇 차례 공사현장을 다녀갔다.

이윽고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 교수가 정계 은퇴를 했을 때였다. 그는 새로운 정치를 위해 창립한 ‘태평양시대위원회’의 사무용품비라도 마련하겠다며 집 마당에 찻집을 짓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갤러리를 겸한 찻집을 짓기로 의기투합했다. 설계비가 얼마냐는 김 교수의 질문에 건축가는 “그냥 1000만원만 주세요”라고 답했다. 지하가 있는 2층짜리 작은 건물의 설계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막연해 던진 말이었다. 김 교수가 즉각 말했다. “알았네. 계좌번호 써 주게.” 이것저것 따지는 게 없는 의뢰인이었다.

김옥길 기념관을 설계한 김인철 건축가(왼쪽)와 김동길 교수.  [사진 아르키움]

김옥길 기념관을 설계한 김인철 건축가(왼쪽)와 김동길 교수. [사진 아르키움]

다음날 설계비 전액인 1000만원이 입금됐다. 계약금 얼마가 입금될 줄 알았던 건축사무소 직원이 깜짝 놀랐다. 김 대표는 ‘통이 크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설계를 시작했다. 설계안을 설명하기 위해 김 교수를 만난 어느 날의 풍경은 이랬다. 김 교수는 손사래부터 쳤다.
“설명 들어도 몰라.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자네 마음에 드나?”
“네. 여러 안을 만들었는데 제일 마음에 드는 안으로 최종 정리해서 가져왔습니다.”
“자네 마음에 들면 짓게.”

듣다못해, 옆에 서 있던 비서가 말을 보탰다. “교수님, 아시는 건축가도 많은데, 연대나 이대 교수한테 자문도 받고 그러셔야죠.” 말 끝나기 무섭게 김 교수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내가 이 친구를 선택했으면 됐지, 무슨 자문을 받나!”

선택했으면 끝까지 믿는다

공사비는 3.3㎡당 300만원으로, 총 2억원(연면적 212.69㎡)을 예상한다고 했더니, 김 교수는 역시나 따지지 않고 “알았네”라고 말했다. 한데 지하공사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터졌다. 마당 아래가 암반이었다. 주택가라 발파공사를 할 수 없어 일일이 쪼아내야 했다. 돌 깎는데 기존 공사비를 다 쓸 정도였고,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그런데 괴짜 건축주는 자기 앞마당에 펼쳐진 공사현장에 한 번 들르지 않았다. 아침에 운동 나가면서 휙, 퇴근길에도 휙 지나칠 뿐이었다.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처사에 건축가는 처음에는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소회했다. 그러다 지나가는 운전기사를 붙잡고 물었다.
“아니,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교수님이 공사현장 들어가서 아는 척하면 바로 자른다고 하셨어요. 공사비가 얼마 들든 그건 알아서 하는 거고, 간섭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1997년 김동길 교수 자택 앞마당에 펼쳐진 공사현장. [사진 아르키움]

1997년 김동길 교수 자택 앞마당에 펼쳐진 공사현장. [사진 아르키움]

김옥길 기념관은 한국 전통건축의 개방성을 현대건축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사진 아르키움]

김옥길 기념관은 한국 전통건축의 개방성을 현대건축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사진 아르키움]

건축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김 대표는 “나중에 댈 핑곗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히 코 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공사 기간이나 공사비가 부족해서, 건축주가 이상해서라고 댈 핑곗거리가 없었다. 공사가 진행될 당시 외환위기가 터졌다. 다른 공사현장은 다 엎어졌는데도 남아 있는 유일한 현장이었고, 처음에 예상했던 공사비를 훌쩍 넘어섰는데도 공사비는 청구하는 족족 나왔다. 작업자들이 의기투합해 장인의 기술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노태우 정권 때 200만호 공급을 내세운 이후 빨리 짓는 것만 몰두해 업계에서 장인이 사라졌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숨어 있었던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다시 보자, 이 놀라운 디테일

김옥길 기념관은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다. 거푸집을 짜서 콘크리트를 붓고, 굳힌 뒤 거푸집을 떼면 얼추 공정이 끝난다. 미장이나 페인트칠과 같은 마감 공사를 따로 하지 않고 민낯을 그대로 노출하기 때문에 공사하기가 까다롭다. 당시 국내에서는 막 시도되던 공법이었다. 치장 없이 재료 본연의 성질을 그대로 드러낸 담백한 맛에 건축가는 이 공법을 택했다.

노출 콘크리트 작업을 위해 통으로 짠 거푸집의 모습.  [사진 아르키움]

노출 콘크리트 작업을 위해 통으로 짠 거푸집의 모습. [사진 아르키움]

김옥길 기념관은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닫혀있기도, 열려있기도 하다.  [사진 아르키움]

김옥길 기념관은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닫혀있기도, 열려있기도 하다. [사진 아르키움]

거푸집이 가장 중요했다. 콘크리트가 굳는 과정에서 터지지 않도록 단단하고 섬세하게 거푸집을 짜야 했다. 마침 한옥 짓던 목수가 이 작업을 위해 현장에 투입됐다. 레미콘 타설도 문제였다. 통상 한층씩 거푸집을 짜고 콘크리트를 치며 쌓아 올리는데, 레미콘 배합 상태에 따라 층마다 콘크리트의 색이 달라질 게 분명했다. 얼룩덜룩한 건물이 되지 않으려면 콘크리트를 한 번에 쳐야 했다. 고민하고 있는데 목수가 나서서 말했다. “2층 건물 통으로 거푸집을 짜보겠습니다.”

양생 과정에서 터질까 봐 이중 삼중 덧댄, 높고 커다란 거푸집 덩어리가 그렇게 완성됐다. 그 덕에 한 번에 콘크리트를 쳤고, 건물은 멋지게 완공됐다. 이뿐만 아니다. ‘김옥길 기념관’은 숨은 디테일의 집합체다. 전등 매입 자리, 걸레받이용 마이너스 몰딩, 계단 미끄럼 방지턱 등을 전부 거푸집에서 제작해 콘크리트를 부어 그대로 완성했다. 추가로 덧대 설치하는 것 없이 거푸집 상태에서 거의 모든 것을 제작해 통으로 완성했다. 창틀마저도 벽체에 자리를 미리 만들어 유리만 끼울 수 있게 했다. 군더더기 없이, 바닥부터 지붕까지 일체화된 건물의 탄생이다.

창틀 없는 유리창 덕에 바깥 풍경을 바라볼 때 군더더기가 없다.  [사진 아르키움]

창틀 없는 유리창 덕에 바깥 풍경을 바라볼 때 군더더기가 없다. [사진 아르키움]

벽면의 걸레받이를 거푸집에서 미리 만들어 콘크리트를 부어 굳혔다.  한은화 기자

벽면의 걸레받이를 거푸집에서 미리 만들어 콘크리트를 부어 굳혔다. 한은화 기자

건물은 마치 네모 상자가 겹겹이 이어지는 형태인데, 사이사이 유리를 끼워 넣어 보는 각도에 따라 닫히고 열린 느낌을 준다. 김 대표는 “한국 건축의 특성인 열린 공간을 만들어 작지만 작지 않은 느낌을 받게 했다”며 “좋은 의뢰인을 만난 덕에 그동안 고민했던 한국성, 노출 콘크리트 공법 등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건물이 완공된 모습을 보고, 김 교수는 그냥 찻집이 아니라 ‘김옥길 기념관’으로 이름 짓자 나섰다. 김옥길 여사(1921~1990)는 김 교수의 누나로 이대 총장,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누이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상징하고 싶을만큼 건물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정말 공사현장이 궁금하지 않았던 걸까. 훗날 저녁 자리에서 “딱 두 번, 밤에 살짝 들어가 봤다”고 건축가에게 털어놓더란다. 김옥길 기념관은 사람을 한번 쓰면 끝까지 믿고 맡기는 김 교수의 성품 덕에 외환위기마저 극복하고 멋지게 완성됐다. 건물은 이대에 기증되어,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람들을 만나며 그의 뜻을 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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