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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번도 포르노 찍었냐"…'포르노'만 집착한 韓정치 코미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14세 아동의 집을 찾아 건강 상태를 살피며 위로하고 있다. 대통령실 홈페이지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14세 아동의 집을 찾아 건강 상태를 살피며 위로하고 있다. 대통령실 홈페이지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에서 촬영한 사진에서 촉발된 ‘빈곤 포르노’ 공방이 점점 한국 정치 수준을 보여주는 희극이 되고 있다.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지난 14일 김 여사의 행보를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이라고 비판하면서 논란은 시작됐다. 그러자 국민의힘은 16일 “부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굳이 그 표현을 찾아서 쓴 것”(장동혁 원내대변인)이라며 장 최고위원 징계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장 최고위원은 17일 페이스북에 “이제 전 세계 외신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제기구에도 적절성을 묻는 공개서한을 보내겠다”며 “‘포르노’만 알고 ‘빈곤 포르노’는 모르는 국민의힘은 공부하라”라고 쓰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그러자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지내온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까지 “빈곤 포르노는 전장연 문제만큼이나 꼭 짚어내야 하는 전근대적 문화.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에서 포르노에 꽂힌 분들은 이 오래된 논쟁에 대해 한 번도 고민 안 해본 사람임을 인증한 것”이라며 참전을 선언했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14세 아동의 집을 찾아 가족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14세 아동의 집을 찾아 가족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뉴스1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는 2000년대 들어 널리 통용되긴 했지만, 관련 논쟁은 1980년대부터 시작됐다. 1980년대는 구호단체의 황금기였다. 에티오피아 난민을 돕기 위해 록밴드 퀸 등이 공연했던 ‘라이브 에이드’도 1985년에 있었다. 모금액만 1억5000만 파운드(현재 환율 기준 약 2400억원)를 기록했다. 당시 많은 구호단체가 역대급 모금액을 기록했는데, 모금에 활용되는 이미지엔 여지없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참담한 현실이 등장했다. 앙상하게 드러난 아이들의 갈비뼈, 파리를 쫓는 손, 기아로 퉁퉁 부은 배 이미지가 흔했다.

이런 이미지를 사용하는 구호단체를 향해 ‘모금을 위해 비참함을 파는 상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00여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런 이미지를 모금에 사용하지 말자는 반성적 운동 과정에서 나온 용어가 빈곤 포르노다. 성적 행위를 묘사하는 포르노그래피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빈곤을 과장하고 자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포르노’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가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에서 제시한 부적절한 사례. 가이드 캡처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가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에서 제시한 부적절한 사례. 가이드 캡처

사실 빈곤 포르노에 대한 논의가 30여년 진행됐기 때문에 시민단체들은 구체적인 기준까지 마련하고 있다. 2014~2017년 ‘최악의 구호 광고’(Rusty Radiator Award)를 선정하며 빈곤 포르노 문제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노르웨이의 SAIH라는 시민단체는 자신들이 대응하려는 빈곤 포르노에 대해 “(피구호자를) 수동적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묘사”, “(빈곤 국가의) 정형화(Stereotype)와 지나친 단순화”, “빈곤의 실제 원인을 모호하게 하는 것” 등으로 설명했다. 한국의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는 구체적인 지침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를 만들고, 10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런 역사적 맥락이나 문제 의식엔 관심이 없다. 김 여사의 사진이 빈곤 포르노와 관련된 구체적인 지침에 해당하느냐, 아니냐는 수준 높은 논쟁은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논쟁은 ‘포르노’라는 표현에 집중되거나, 아니면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가 선정적이냐, 아니냐’ 또는 ‘오드리 헵번을 따라 했냐, 아니냐’로 흐르고 있다.

국민의힘 여성 의원들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남아 순방에서 김건희 여사의 외교 행보를 ‘쇼윈도 영부인’, ‘빈곤포르노’ 등으로 지적한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의 최고위원직 사퇴 및 제명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국민의힘 여성 의원들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남아 순방에서 김건희 여사의 외교 행보를 ‘쇼윈도 영부인’, ‘빈곤포르노’ 등으로 지적한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의 최고위원직 사퇴 및 제명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공격하는 쪽이나 수비하는 쪽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단어를 선택해 결과적으로 유사 성희롱을 했다”(조은희 국민의힘 의원), “포르노라는 말은 적합하냐, 그러면 헵번이 포르노 찍었는가”(최형두 국민의힘 의원), “(김 여사가) 오드리 헵번 코스프레하고 재클린 케네디가 (입었던) 민소매 드레스 입고 나갔다”(박지원 전 국정원장) 등의 발언이 잇달아 나왔다.

김건희 여사를 공격하는 쪽이나, 이를 방어하는 국민의힘 관계자들 모두 누구를 깎아내리기 위한 경쟁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정치의 낮은 담론 수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결정적 사례와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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