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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기현의 살아내다

'아빠의 아빠' 된 지 11년…아빠 죽길 바란 내가 달라진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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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은 아마 모두에게 남다른 명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코로나 19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 없이, 그러니까 몇 명이든 상관없이 보고 싶은 가족·친지와 한자리에서 만나는 게 공식적으로 허용된 첫 명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양병원과 요양원은 달랐다. 손을 잡을 수 있는 접촉 면회가 여전히 금지됐다. 요양병원에 있는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대면한 건 거의 석 달 전이었다.

아버지 폐에 이상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다. 요양병원에서 할 수 있는 처치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종합병원으로 이송해 치료해야 했고, 난 간병인 자격으로 그렇게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2년 만의 제대로 된 첫 대면이었다. 코로나로 폐쇄된 요양병원에서 아버지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더 많이 늙었을까? 팔·다리 힘이 쭉 빠진 건 아닐까? 아버지를 마주하는 건 지난 2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하고 꺼내보지 않았던 근심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누워있는 아버지 모습이 걱정스러우면서도, 아버지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운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들었다. 위중한 아버지를 보고도 반가움이 앞설 만큼 지난 2년은 참 길고도 길었다. 나는 아버지가 몸을 뉜 환자 침대 옆 보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보조 침대에 누우니, 문득 11년 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보려던 스무살에 나는 ‘보호자’로 병원에 불려갔다. 아버지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남았고, 동생은 어머니를 따라갔다. 한부모가정이었기에 쓰러진 아버지의 유일한 보호자는 나 하나였다. 누군가 쓰러지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도움을 받거나 조언을 구할 만한 어른이 내 주변에는 없었다. 그저 몸으로 부딪히며 눈앞에 벌어진 일들을 나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했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빠르게 회복했다. 그만큼 병원비도 빠르게 불어났다. 당장 병원비를 마련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하루 생계도 쉽지 않았다. 막막한 마음에 병원 사회복지과와 구청을 찾았다. 복지 신청을 해보려 했지만, 요건 한두 가지가 튀어나온 돌부리마냥 자꾸만 나를 걸려 넘어지게 했다. 안 되는 이유는 다양했다.

어떨 땐 어머니와 위장 이혼이 의심된다고, 다른 어느 날은 아버지 앞으로 실손의료보험이 있다고, 또 어떤 날은 지원해줄 수 있는 소득 기준을 아주 조금 넘는 돈을 내가 벌었다고, 나의 복지 신청은 반려되고 또 반려됐다. 긴급복지 의료지원이나 기초생활수급자, 이런 복지 제도가 있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빡빡한 기준 탓에 실제로 내가 받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살던 월셋집의 보증금 절반을 빼서 병원비를 냈다.

사람이 아프면 돈이 필요하고, 간병이 필요하며, 환자 대신 여러 큰 결정을 내리고 여러 행정 서류를 뗄 보호자도 필요하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겪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렇지만 치료만 끝나면 다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다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버지의 몸은 과거로 되돌릴 수 없었고 아버지는 결국 실직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실직이 모든 걸 무너지게 한다는 걸. 가난했던 집은 더 가난해졌다. 사실 나보다 아버지가 더 문제였다. 일을 나가며 어울리던 인간관계도 다 사라졌고, 일하지 않고 남는 시간을 어떻게 쓸지 막막한 듯했다. 아버지는 스스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됐다고, 그렇게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한순간에 사라진 ‘일’ 자리를 ‘술’에 내어줬다. 병은 그렇게 아버지의 삶을 주저앉혔다.

아버지가 절망하는 사이,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변변한 학력은커녕 아무 경력도 없는 나는 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장시간 몸을 써야 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돈이 모이면 학원에 다니며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우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크게 아플 때마다 병원비를 내는 데 급급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배움의 시간을 아버지 돌보느라 다 빼앗겨버리는 것만 같았다. 처음 쓰러진 뒤 6년쯤 지났을 무렵부터는 아버지에게 인지 저하가 찾아왔다. 병원에서는 치매라고 했다. 아버지도, 나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아빠’가 되어 그렇게 11년을 살았다. 그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생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아버지를 돌보는 과정에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맸던 순간도 많았다. 또래들처럼 내 진로를 고민하고 무언가 배우기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고통을 유별나게 나만 겪는 것일까? 나 말고도 누군가 또 어디선가 혼자서 이런 고통을 견디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고통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혼자서 다 감당하는 게 맞는 걸까? 경험했던 이들이 모여서 해결책을 고민해볼 수는 없을까?

이런 고민 끝에 나는 2019년 아버지를 홀로 9년간 돌본 경험을 담은 책『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냈고, 비슷한 경험을 가진 돌봄 청년, 돌봄 청소년을 만나 대화할 수 있었다.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돌봄 청년, 돌봄 청소년의 목소리를 보건복지부에 전달하고 지원정책을 함께 만들기도 했다.

누군가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 손쉽게 불행을 떠올릴 거 같다. 하지만 난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을 불행으로만 정의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아버지를 돌보느라 하지 못한 걸 아쉬워만 하기엔 배움 역시 컸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에너지의 원천도 이 배움에서 나왔다고 믿는다.

사실 혼자 아버지를 돌봐야 했을 땐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쁜 일이 한꺼번에 닥칠 때는 아버지가 죽어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버지라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이럴 때 아버지가 기뻐하는구나, 무서워하는구나.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결합해 아버지라는 한 사람의 역사를 되짚다 보면 가족을 넘어 그저 함께 생을 살아내는 동료 같았다. 내가 아버지를 돌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감정들이다.

종합병원에서 아버지는 무사히 회복했다. 퇴원하는 날, 요양병원에 가기 전 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 “아무거나 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말대로 무작정 걷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팔씨름하고, 공원에서 같이 셀카를 찍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버지를 신난 표정을 보니 기쁘면서도 슬펐다. 코로나와 함께 한 지난 2년 동안 아버지가 한 번도 누리지 못한 일상이기 때문이었다. 늙고 아프고 가난해도 다양한 즐거움을 느끼며 살 수는 없을까? 요즘 내가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다.

아픈 부모를 돌보는 청년은 예외적인 사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돌봄과 무관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구나 언젠가 돌봄을 받았고, 돌봄을 받고 있으며, 돌봄을 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돌봄에 좀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건강하고 독립적인 것만 삶이 아니다. 독립적으로 사는 힘만큼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거꾸로 누군가에게 품을 내어주는 힘도 중요하다. 돌봄에 대한 거리두기를 멈추고, 한번 대면해보면 어떨까? 우린 누구든지 돌봄의 슬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는 동료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