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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인규가 고발한다

이상민 경질은커녕 실무자 탓만…'엘리트주의' 尹정부 자충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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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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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현서 기자

그래픽=김현서 기자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The buck stops here).' 33대 미국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의 좌우명이자 지난 5월 방한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선물한 명패의 문구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에 이 문구를 좋아한다며 당선되면 이를 상징하는 물건을 집무실에 놓겠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대통령을 비롯해 모든 정무직 공무원에게 있어 ‘무한 책임’의 정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윤 대통령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10·29 참사를 계기로 나를 포함한 상당수 국민이 그 믿음을 잃고 있다.

대한민국은 한순간에 깊은 아픔에 빠졌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 모인 인파 가운데 158명이 사망하고 200명 가까이 다쳤다.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즉각 '국가는 없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실제로 그날의 참사를 재구성해보면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고 당일뿐만 아니라 그날 이후에도 국민이 기대고 신뢰할만한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대기 대통령실장의 지난 8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 발언이 이 상황을 상징한다. 그는 “매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장관 바꿔라’ ‘청장 바꿔라’ 하는데 이것도 후진적”이라고 답했다. 국민 정서와 완전히 동떨어진 김 실장의 답변이야말로 후진적이다.

청년정의당·청년진보당·청년녹색당 당원 등이 지난 3일 서울 이태원역 주변에서 침묵 시위를 벌였다. 연합뉴스

청년정의당·청년진보당·청년녹색당 당원 등이 지난 3일 서울 이태원역 주변에서 침묵 시위를 벌였다. 연합뉴스

정치 지도자는 평소엔 있으나 없으나 별 필요 없는 존재로 비치는 경우가 많지만, 위기상황 속에서는 실력이 드러난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무식한 삼류 바보들을 데려다가 정치를 해서 나라 경제 망쳐놓고, 외교·안보 전부 망쳐놓고”라고 말했다. 정부 출범 초기 일부 장관 후보자의 자질과 관련해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전 정권에서 이렇게 훌륭한 장관 봤어요?”라고 반문한 적도 있다. 대통령이 말한 '훌륭한 장관'의 기준은 학벌을 포함한 학력, 고시 합격과 고위 공직 경험 등의 이력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엘리트주의에 기댄 윤 대통령의 자만심은 결국 자충수로 돌아왔다.

윤 대통령은 이번 참사에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을 경질하기는커녕 경찰과 소방당국의 하급 현장 공무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핵심 각료들은 연일 일반 국민 눈높이와 잘 맞지 않는 고압적인 발언과 공감 능력을 상실한듯한 비상식적 태도를 취했다. 현 정부의 엘리트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쏟아지는 이유다. 한마디로 대형 참사에 상처 입은 국민 마음을 보듬기엔 부족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엘리트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공감 능력이다. 공감은 소통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고시 출신에 이미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바 있는 한덕수 총리는 참사 직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누구도 웃지 않을 농담을 했다. 판사 출신에 윤 대통령 측근으로 알려진 이상민 장관은 처음부터 줄곧 본인에게 법적 책임이 없다는 식의 자세를 견지했다. 지난 정권처럼 얄팍한 감성적 쇼를 하라는 게 아니다. 국민이 기대하는 최소한의 공감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지난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이태원 사고 관련 외신기자 브리핑을 하는 한덕수 국무총리. "한국 정부 책임의 시작과 끝은 어디로 보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 전에 잠시 통역 장비에 문제가 생겼던 것에 빗대 "이렇게 잘 안들리는 것의 첫 번째와 마지막 책임은 뭔가요?"라는 농담을 던졌다. 뉴시스

지난 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이태원 사고 관련 외신기자 브리핑을 하는 한덕수 국무총리. "한국 정부 책임의 시작과 끝은 어디로 보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 전에 잠시 통역 장비에 문제가 생겼던 것에 빗대 "이렇게 잘 안들리는 것의 첫 번째와 마지막 책임은 뭔가요?"라는 농담을 던졌다. 뉴시스

현 정부의 엘리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책임을 피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하며 직접 나서서 위기를 극복하려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때만 해도 관료들이 이렇지는 않았다. 이주영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은 취임 한 달 만에 터진 대형 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사표를 제출한 후 책임 있는 자세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말 그대로 안전과 재난에 있어서는 '무한 책임'을 보인 것이다. 지금 윤 대통령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무책임'한 모습과 대비된다. 학벌 좋고 고위직 경험이 많은 엘리트 출신인 게 그 자체로 흠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치적 훈련이 덜 된 채로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태도를 보이면 국민은 집권 세력을 오만하고 이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들 엘리트가 설사 공감 능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탁월한 업무 능력을 보여줬다면 실망의 크기가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위기 상황 컨트롤타워 부재는 말할 것도 없고 인파가 몰릴 게 뻔히 예상되는데도 경찰이나 행안부, 지자체는 대비 계획을 세우는 데 미온적이었다. 엘리트로 채워진 내각을 보면서 국민은 이들의 행정이 과거보다 나아지기를 기대했지만, 실상은 과거 정부 때와 다르지 않거나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나빠졌다. 운동권 출신과 그 주변 인물로 주요 자리가 채워진 문재인 정부에 실망했던 국민은 지금 엘리트주의 정부의 또 다른 무능함에 절망하고 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원들이 지난 11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10·29 참사 책임 전가 행정안전부 장관 사퇴 촉구 집회를 열었다. 뉴스1

전국공무원노동조합원들이 지난 11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10·29 참사 책임 전가 행정안전부 장관 사퇴 촉구 집회를 열었다. 뉴스1

윤 정부 엘리트들의 남 탓 역시 국민의 실망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인생 전반을 누구에게 지적받지 않는 엘리트로 살아왔기에 “내 탓”이라는 정치적 책임이 생소한듯하다. 특히 이 정부 요직을 차지한 판·검사 출신은 선악 구조의 틀 속에서 남을 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자기 자신은 무오류라는 전제가 있어야 그 직을 잘 수행할 수 있었기에 정치의 영역에 온 지금도 법조인의 틀을 벗지 못하고 여전히 무오류의 착각 속에서 “네 탓”에 매몰돼 있다. 경찰 탓, 소방 탓, 언론 탓, 피해자 탓을 하면서 아직 고위직 그 누구도 아무런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은 게 이런 그들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허망한 엘리트주의가 이끄는 정치 지도자 부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똑똑한 머리로 자신의 법률적 책임부터 계산하는 고관대작 대신에 국민의 슬픔과 상실감을 먼저 알아주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리더들을 보고 싶다. 그런 정치 지도자의 공적 책임감이 대한민국 정치를 성숙하게 하고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