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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가 정계진출] "정치 세력화" "순수성 저해"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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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경숙 전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상임대표가 정계에 진출했다. 지난달 27일 발족한 '열린우리당'의 창당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 자격이다. 이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입당을 놓고 여성계가 시끌시끌하다. 여연도 자못 당황해하며 내부에서 일부 활동가들이 반발했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과 함께 "여성운동의 순수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앞으로 여성운동가들의 정계 진출은 줄줄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총선에서는 전국구 의원의 50%를 지퍼식으로, 즉 1-3-5…번과 같이 두명에 한 명꼴로 여성에게 할당토록 돼 있어 어느 때보다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여성단체장은 떼어논 당상?=선거철이 되면 여성단체의 대표는 정계로부터 '러브콜'을 많이 받아왔다. 1990년대 이후 진보적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여연의 경우 초대 대표였던 이우정씨를 비롯, 박영숙.이미경.한명숙.지은희씨 등이 모두 대표를 역임한 뒤 정.관계에 진출했다.

이연숙.최영희 의원과 김화중 장관 등은 보수적 성향의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이하 여협) 출신. 또 YWCA나 한국여성유권자연맹 등의 단체도 제법 많은 숫자의 여성정치인을 배출해 왔다.

여연은 올 초부터 여성운동가의 정계 진출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여왔다. 9월 초에는 전국의 회원단체들이 모여 1박2일 동안 이 문제를 놓고 밤새 토론했으나 찬반 양론이 팽팽했다.

2000년 여연은 '임원이나 실무자로 있을 동안에는 정치권에 진출할 수 없다'는 자체 내규를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임기 중이라도 3개월 전에 사퇴하면 선거에 나갈 수 있다'로 고쳤다.'러브 콜'을 받으면 얼마든지 정치권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연의 이같은 결정은 회원단체는 물론 여타 다른 여성단체들에 큰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여연 외의 다른 여성단체들은 자체 내규를 두고 있는 경우도 거의 없다. 오히려 단체장의 정계 진출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언제까지 세계 1백4위로 머물 순 없다"=이위원장은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여성운동이 당면한 현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않아 총대를 메는 심정으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고 말했다.

인터뷰에 응한 많은 여성운동가도 원칙적으로 여성의 정치권 진출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는데 한결같이 공감했다. 최근 국제의원연맹(IPU)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원의 의석 점유율은 5.9%. 네팔과 함께 전세계 1백4위에 그쳤다.

여연의 남윤인순 사무총장은 "호주제 폐지 등 많은 입법안이 국회의 무관심.무책임 때문에 번번이 폐기될 처지에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활동가들이 국회 진출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한 여성단체장은 "여성운동은 남녀의 힘의 차이를 없애려는 정치운동"이라며 "운동가들의 정계 진출을 백안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이화여대 여성학과 조순경 교수는 지난 9월 젊은 여성주의자들의 인터넷 신문인 '일다'(www.ildaro.com)에서 여성단체장의 정계 진출을 신랄하게 비판해 온.오프 공간을 달구었다.

조교수가 지적하는 문제는 크게 세가지.▶여성운동의 비판 기능과 권력 감시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운동단체의 조직력과 활동력이 약화된다▶운동의 순수성이 의심 받아 주장의 정당성과 설득력이 약화된다는 것.

1백여개의 여성단체들은 지난 8월 19일 '총선여성연대'를 결성하고 여성할당제 등을 강하게 요구해왔다.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대다수 여성단체장은 총선여성연대에 참가하고 있다. "여성 운동을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는 세간의 의혹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여협 출신의 한 관계자는 "최근 여협회장 자리를 놓고 추태를 보이는 것도 솔직히 내년 총선과의 연관성을 부인키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비판과 감시 기능이 약화된다는 지적도 공감을 얻고 있다. 여연 회원단체의 한 대표는 "여연의 전직 대표가 여성부 장관이 되면서 여연의 비판 강도가 약해진 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모 여성단체 대표는 "정치를 할 사람은 일찍부터 정당에 들어가 크도록 해야 한다"며 "전문가 그룹과 젊은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여성운동이 뒷바라지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사진 설명 전문>
지난 8월 발족한 총선여성연대가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 여성할당제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참석한 일부 단체장들이 17대 국회에 진출할 가능성이 커 '제밥그릇 챙기기'라는 의혹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성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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