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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금이 19금이 된 순간…왜 분노는 게임위에만 쏟아졌나 [현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시작은 한 장의 일러스트였다. 나체에 가까운 미성년자 여성 캐릭터의 둔부를 문어가 휘감고 있는 그림. 빼도 박도 못하는 ‘19금 일러스트’였다. 게임물관리위원회(이하 게임위)의 설명대로 “성행위를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게임위 불공정 심의 논란’ 이야기다. 논란의 시초인 넥슨의 15세 이용가 게임 ‘블루 아카이브(이하 블루아카)’는 해당 일러스트를 포함한 몇몇 장면이 문제가 되며 지난달 게임위로부터 청소년 이용 불가 등급 판정을 받았다.

15세 이상 이용가에서 청소년 이용 불가로 등급이 상향된 넥슨의 수집형 RPG ‘블루 아카이브’. 이용자가 미소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란 컨셉이다. 문제가 된 선정적인 일러스트 등은 보도윤리상 생략했다. 사진 넥슨

15세 이상 이용가에서 청소년 이용 불가로 등급이 상향된 넥슨의 수집형 RPG ‘블루 아카이브’. 이용자가 미소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란 컨셉이다. 문제가 된 선정적인 일러스트 등은 보도윤리상 생략했다. 사진 넥슨

뒷면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여초 커뮤니티 ‘해연갤’의 선정성 지적 민원을 계기로 블루아카의 등급이 상향된 정황이 알려진 것. 등급 상향에 항의하는 이용자들을 중심으로 10월 4일부터 일주일 간 게임위엔 블루아카에 대한 민원만 1만 4628건이 밀려 들었다. 직전 1년간 게임위에 접수된 블루아카 관련 민원은 12건뿐이었다. 분노한 이용자들은 특정 여성향 게임에 수천 건의 보복 민원 등을 넣기도 했다. 한 이용자는 “게임위 조치의 밀실성과 비일관성을 지적하는 게이머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넥슨은 어디로 숨었나

블루아카 게이머들은 억울할 수 있다. 게임을 해보지도 않은 자들이 서비스컷 몇 장으로 ‘야겜(야한 게임)’ 낙인을 찍었으니.

그러나 이 건은 넥슨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넥슨은 15세 이용가를 걸어놓고 은근슬쩍 19금 서비스컷을 제공해 이 사태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다 이용자 분노가 게임위로 향하는 사이 책임을 피했다. “미성년자 여캐한테 춘화 모티브(문어) 쓰지 말라”고 비판한 일부 이용자들의 경고도 흘려 들었다.

실제로 블루아카는 등급재분류 이의신청을 포기했다. 대신 ‘청불’이 된 기존 버전과 별개로 ‘틴(teen) 버전’을 만들기로 했다. 똑같이 19금으로 등급이 상향될 뻔 했던 넷마블 ‘페이트 그랜드 오더’(12세 이용가)는 이의신청을 통해 15세 이용가가 되는 데 그쳤다. 기존 게임을 유지하기로 한 넥슨의 대응은 ‘청불이 맞다’는 인정에 가깝다.

김용하 넥슨 블루 아카이브 총괄 PD가 지난달 4일 올린 ‘틴 버전’ 분리 관련 공지. 사진 넥슨 공식 커뮤니티 캡처

김용하 넥슨 블루 아카이브 총괄 PD가 지난달 4일 올린 ‘틴 버전’ 분리 관련 공지. 사진 넥슨 공식 커뮤니티 캡처

실력과 투명성 의심받는 게임위

상황이 이런데도 왜 이용자 분노가 게임위만을 향했던 걸까. 블루아카 사태를 계기로 게임위의 수많은 ‘업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4년 직원 간 성추행, 같은 해 간부의 뇌물수수 혐의, 2019년 과도한 인디게임 규제 논란, 2020년 용역 사업 결과 허위 보고, 2022년 사무실 PC로 코인 채굴하다 걸린 직원…. 지금은 감사원 조사도 받고 있다. 세금 40억원을 들인 외주 등급분류 관리 시스템이 사실 ‘먹통’이었다는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각종 논란은 “내부에 장기간 누적된 구조적 적폐”(한국게임학회)라는 욕을 먹기 딱 좋았다.

본업인 ‘게임 심의’ 실력도 문제가 됐다. 꾸준히 비판받은 “일관치 못한 심의 기준과 투명치 못한 심의 과정”(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실 관계자)에 더해 심의위원들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그렇게 이용자들은 ‘불만’을 ‘정의 구현’으로 포장할 명분을 얻었다.

게임위는 결국 10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심의위원들의 등급분류 회의록을 공개하고, 외부 게임 전문가 2명을 심의위원으로 추가 위촉하겠다”고 밝혔다. 이용자와 상시 소통할 수 있는 채널도 구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기존 게임들의 등급분류 결과에 대해선 “공정했다”고 주장했다. ‘불공정’이 자주 감지됐던 조직문화에 대한 쇄신 언급은 없었다.

게임물관리위원회 간부들이 10일 서울 서대문구 게임위 수도권사무소에서 열린 이용자 소통 강화 기자 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정민 기자

게임물관리위원회 간부들이 10일 서울 서대문구 게임위 수도권사무소에서 열린 이용자 소통 강화 기자 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정민 기자

15금이 19금이 된 순간

15금 게임 블루아카가 19금 게임이 되는 과정에서 게임 산업과 커뮤니티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민원을 통해 갈등을 되풀이하는 젠더 커뮤니티, 자율심의 능력을 의심받는 대형 게임사, 부실 행정을 반복한 규제 기관까지. 모두 각자의 ‘공정’만 외쳤다.

게임위의 잘못은 분명히 많다. 스스로 ‘4개 분야 13개 세부실천 과제’를 내놓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게임위만 욕하고 끝낼 일은 아니다. 남의 정의를 부정하고, 나의 정의를 우길 때 ‘공정’이란 말을 남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사업자도 이용자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례한 ‘공정’ 경쟁 사회가 지친다.

※ 바로잡습니다
당초 “여초 커뮤니티 ‘해연갤’의 주도로 10월 4일부터 일주일 간 1만 4628건의 민원이 밀려들었다”고 보도했으나, 게임위는 “대략 70% 이상이 블루아카 등급 상향에 항의하는 민원으로 파악된다”고 알려왔습니다. 이에 해당 부분을 바로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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