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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질 게 터졌다”…‘멋대로 등급분류’ 게이머 들끓게 만든 곳 [팩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최근 청소년 이용 불가 등급으로 재분류된 넥슨 모바일 미소녀 수집형 RPG ‘블루 아카이브’. 사진 넥슨

최근 청소년 이용 불가 등급으로 재분류된 넥슨 모바일 미소녀 수집형 RPG ‘블루 아카이브’. 사진 넥슨

무슨 일이야

게임물관리위원회(이하 게임위)의 ‘고무줄 등급분류’를 두고 불공정 심의 논란이 커지고 있다. 15세 이용가였던 넥슨 ‘블루 아카이브’ 등 일부 서브컬처 게임들이 선정적이라는 집단 민원 이후 ‘청소년 이용 불가’로 등급이 상향되자, 게임 이용자들 사이에서 게임위의 전문성에 대한 지적이 터져나왔다. 이용자 반발은 서명운동, 국민청원 등으로 번지면서 논란은 정치권으로도 확산됐다.

게임물 등급분류가 뭐야? 

현재 게임물은 2017년 도입된 자체등급분류제에 따라, 게임위가 일정 기준을 만족한 자체등급분류사업자를 선정하면 이들이 유통할 게임의 등급분류를 매기도록 돼 있다. 삼성·구글·애플 등 유통 대기업들이 자체등급분류 사업자다. 게임물관리위는 해당 분류가 적절한지 사후 모니터링해 필요시 등급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청소년이용불가 게임물 및 아케이드 게임은 자체등급 분류 아닌 게임물관리위의 사전 심의를 받는다.

기름 부은 건

이른바 ‘블루아카 사태’ 자체는 인터넷 커뮤니티 내 젠더 갈등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게임위의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규제 기관의 전문성·투명성 문제로 비화됐다. 게임위가 ‘바다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아케이드 게임 ‘바다신2’를 전체 이용가로 심의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의 과정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밀실 심사 관행도 지적됐다.

게임 전문 유튜브 ‘김성회의 G식백과’가 게임위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을 소개하고 있다. 해당 영상에는 게임위에 불만을 표출하는 이용자들의 댓글이 이어졌다. 사진 김성회의 G식백과 캡처

게임 전문 유튜브 ‘김성회의 G식백과’가 게임위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을 소개하고 있다. 해당 영상에는 게임위에 불만을 표출하는 이용자들의 댓글이 이어졌다. 사진 김성회의 G식백과 캡처

이를 계기로 자의적인 등급분류 기준과 심의위원 자질이 도마에 올랐다. 심의위원 9명은 사회 각 분야에서 추천을 받아 위촉되는데, 위원들의 게임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상헌 의원실(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심의위원들이 게임 등급분류 시 의견을 개진한 비율은 5.93%에 그쳤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외주 비리 의혹’도 불거졌다. 2017년 약 40억원의 세금을 들여 외주를 맡긴 자체등급분류 사후관리 시스템이 5개 중 2개가 정상 작동하지 않는 등 ‘먹통’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각종 게임 커뮤니티에선 “이번 기회에 썩을대로 썩은 게임위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 “전문 기관에 전문성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는 격앙된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한국게임학회는 지난 7일 성명을 통해 “게임위는 가장 중요한 역할인 심의와 사후관리를 형식적이고 방만하게 수행했다”며 “기능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게 왜 중요해

① 행동하는 이용자들
게임위의 석연찮은 등급분류에 대한 불만은 이전에도 많았다. 그러나 “부실한 심의 기관을 심의하자”는 이용자 움직임이 집단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 지난달 29일 국회 앞은 ‘게임위 비위 의혹 규명을 위한 국민감사청구 연대서명’에 참여하려는 이용자 5489명으로 서강대교 남단까지 장사진을 이뤘다.

연대서명을 주최한 이상헌 의원실 관계자는 “국민감사청구제도가 도입된 2001년 이래 가장 많은 서명이 이뤄졌다”며 “감사원의 게임위 감사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앞서 게임물 사전심의 폐지를 요구하는 국민동의청원에도 이용자 5만명이 동의하면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됐다.

게임업계는 이를 ‘게이머 세대교체’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젊은 이용자들을 중심으로 기업과 정부에 공정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 한 대형 게임사 관계자는 “이용자들의 결속력이 굉장히 높아졌다”며 “확률형 아이템 조작 논란, 우마무스메 부실 운영 등 게임사들을 상대로 트럭 시위, 마차 시위를 해본 이용자들이 이번엔 규제 기관을 향해 ‘똑바로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15세 이용가로 등급이 상향 조정된 넷마블의 수집형 RPG ‘페이트 그랜드 오더’. 사진 넷마블

최근 15세 이용가로 등급이 상향 조정된 넷마블의 수집형 RPG ‘페이트 그랜드 오더’. 사진 넷마블

② 콘텐트 심의 판도 변할까
이같은 흐름이 한국의 낡은 콘텐트 규제 체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K콘텐트가 세계화되고, 유통 채널이 다양해진 만큼 기관심의 대신 자율심의, 사전심의 대신 사후심의를 도입할 때란 주장이다. 특히 업데이트가 잦은 게임의 특성상 사전심의 원칙이 맞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OTT업계는 지난 9월 국회에서 영화비디오진흥법이 개정되면서 자율심의 길이 열렸다. 현재는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를 받은 영상만 공개할 수 있지만, 내년 4월부턴 지정된 OTT 사업자에 한해 자체 심의후 유통이 가능해진 것. 이는 원칙상 사전심의지만 삼성·구글·애플 등 유통 대기업에 자율심의(자체등급분류)를 맡기는 현행 게임위의 게임 심의 체계와 유사하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앞으로는

이용자들의 근본적인 불만은 게임에 대한 게임위의 관점이다. 게임을 ‘청소년 교육에 부정적’이며 ‘사행심을 유발하는 유해 매체’로 보고 심의한다는 점이다. 등급분류 기준이 영상·웹툰 등 국내 다른 산업이나 해외에 비해 지나치게 보수적이란 지적이나,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고 심의위원을 선발하는 구조 등에 비판이 계속되는 배경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게임위는 오는 10일 기자 간담회를 열고 이용자 소통 강화 방안 등을 발표하기로 했다. 다만 게임업계는 게임위가 외주 비리 의혹 등에 대해선 입장을 밝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김규철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 등 게임위는 오는 10일 이용자 소통 강화 간담회를 열기로 했다. 사진은 지난달 1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규철 게임위원장. 국회사진기자단

김규철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 등 게임위는 오는 10일 이용자 소통 강화 간담회를 열기로 했다. 사진은 지난달 1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규철 게임위원장. 국회사진기자단

더 알면 좋은 것

사실 콘텐트 규제에 있어 게임과 OTT는 서로를 부러워하는 사이. 뒤늦게 사업자 자율심의의 문이 열린 OTT는 일찍이 자체등급분류가 도입된 게임의 규제 완화 ‘속도’를 부러워했다. 또 총 맞아 피나거나 성행위를 연상만 시켜도 바로 ‘19금’ 딱지가 붙는 게임은 OTT의 규제 ‘강도’를 부러워했다. 바꿔 말해, 글로벌 기준에 맞는 심의 체계가 되려면 속도도 강도도 손 봐야한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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