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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난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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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는 매년 이슬람 성지 순례 기간 수백만 명이 몰려든다. 자마라트 다리에서 ‘악마의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식은 성지순례의 하이라이트다. 그 자마라트 다리에 사람이 몰려 300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2006년 일어났다. 군중 역학 전문가인 디르크 헬빙 교수 등은 당시 사고 현장 영상을 분석해 ‘군중 난류(crowd turbulence)’ 현상을 발견한다.

 난류(亂流)란 무질서하고 비정상적인 유체의 움직임이다. 수도꼭지를 조금만 열면 물줄기가 수직으로 똑바로 떨어지지만, 유량을 늘리면 물방울이 불규칙적으로 튀듯이 쏟아진다. 마찬가지로 밀집도가 높아지면 사람들은 마치 물처럼 한 덩어리의 유체인양 불규칙하게 요동치게 된다. 이를 ‘군중 지진(crowd quake)’이라고도 하는데, 지진처럼 통제가 불가능하고 위협적이다.
 가로세로 1m당 7명을 넘어서면 군중 난류가 형성되고, 그 속에 낀 사람들은 마치 파도에 휩쓸리듯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출렁이게 된다. 이런 밀도에선 숨 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각자 안간힘을 쓰는데, 그 힘이 서로 맞닿은 사람들 간에 전달되며 물리적으로 증폭된다. 군중 난류가 생기면 몇 사람만 균형을 잃고 쓰러져도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 넘어진 곳에 생긴 공백 때문에 지탱할 곳이 없어진 사람이 그 위로 엎어지면서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때문이다.
 일단 군중 난류가 생긴 뒤에는 돌이키기 어렵다. 사람과 사람 간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일방통행으로 군중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식으로 예방해야 한다는 게 군중 역학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처방이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토끼 머리띠를 한 남성이 사람들을 밀쳤다는 등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참사를 유도했다는 음모론이 돈다. 무리 속에 낀 몇 명이 일부러 압사를 유도했다는 건 다분히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밀집된 군중 속에서 사람 하나하나는 물줄기 속의 물방울일 따름이다.
 사우디는 2006년 자마라트 다리 참사 이후 증·개축 등을 통해 참가 인원을 분산했다. 하지만 2015년 자마라트 다리로 향하는 길목에서 수백 명이 숨졌다. 몇 년간 사고 없이 넘어갔더라도, 당국이 긴장을 놓으면 언제든 참사가 빚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