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조용한 해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최현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현주 금융팀 기자

최현주 금융팀 기자

“4년 차인 후배가 1박2일로 워크숍을 가자네.” 얼마 전 1년 만에 회식했다는 지인의 말이다. “뭘 하자고 했다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입사하고 (대면) 회의도, 회식도 못 해봤다며 정기적으로 해도 좋겠단다. 중견 팀원들 얼굴은 흙빛으로 변하고. 못 들은 체할 수도 없고…. 고민이다.”

4년 차…. 코로나19와 함께 입사해 회의와 회식의 엄혹함을 모를 연차다. 아직 모든 게 궁금할 테다.

2010년대만 해도 매주 월요일 회의를 했다. 한 주간 쓸 기사와 취재 계획을 쭉 써서 팀원들 수만큼 출력해 가지런히 회의실 책상 위에 두면 한 시간에 걸쳐 팀장에게 순서대로 혼이 났다.

선배는 후배 앞에서 팀장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을 테고, 후배는 선배들에게 돌아가며 혼나는 것이 힘들었다. 회의 후엔 늘 새벽까지 함께 어울렸다. 회의 때 혼나서 기분도 더러운데 마주 앉아 술 마시고, 노래하고, 또다시 술을 마셨다.

“여성들은 먼저 들어가”라는 소리에 오기가 발동해 끝까지 앉아있다 보면 어느덧 해가 뜨기도 했다. ‘월요병’ 수준이 아니라 ‘월요 악몽’이었다. 코로나19 이후 가장 좋은 점이 PC나 전화로만 소통하는 ‘대면 부재’였다. 그런데 대면 부재가 자칫 ‘소통 부재’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받은 월급만큼만,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겠다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에 이어 ‘조용한 해고(Quiet firing)’까지 등장했다. 직원이 제 발로 퇴사할 때까지 별다른 지적이나 지시 없이 연봉 동결, 승진 누락, 성장기회 박탈, 업무 피드백 제외 같은 조처를 하며 고의로 방치한다. 근로자가 일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듯 기업도 근로자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대한다.

회식 때 가장 듣기 싫은 건배사가 “우리가 남이냐!”였다. 그때마다 “어, 우리 남 맞아”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남은 남인데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남이다. 꼭 일에서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꼭 돈벌이 수단이라고 선을 그을 필요도 없다. 돈도 벌고, 보람도 찾는다면 삶이 더 즐거울 수 있다.

조용히 방치할 수 있지만 ‘꼰대’ 소리 각오하고 새내기 후배가 어엿한 몫을 할 수 있도록 때론 잔소리할 필요도 있다. 소통을 거부하는 조용함에는 삶을 바꾸는 힘 같은 건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