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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징그러웠다" 생존자의 고백…단 하나의 악플도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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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이태원 참사 현장 주변 경찰 통제선 밑에 추모꽃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7일 이태원 참사 현장 주변 경찰 통제선 밑에 추모꽃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제 치료과정으로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달 29일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상인 등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된 A씨(33·여)는 지난 2일부터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상담일지 등을 올리며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참사 원인과 책임을 둘러싸고 갖은 주장과 감정 표현이 난무한 세상을 향한 말 걸기를 시작한 것이다. 첫 글의 제목은 ‘선생님,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였다. 그는 “단 한 명이라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6일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참사 생존자의 이야기

국가애도기간 종료 후 첫 월요일인 7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인 이태원역 1번 출구에 꽃들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국가애도기간 종료 후 첫 월요일인 7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인 이태원역 1번 출구에 꽃들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A씨=“선생님, 저는 사실 생존자는 아닌 거 같아요. 사상자 300여명 안에도 들지 못했고 (제가) 오버해서 슬퍼하는 거 아닐까요.”
▶상담사=“왜 본인이 피해자라고 생각을 안 하세요? 그날 밤새 잠도 못 자고 브리핑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피해자예요. 우리 모두가 인식을 바꾸어야 해요.”

 A씨가 참사 피해자 등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전화 상담에서 처음으로 털어놓은 속마음이다. “당신은 참사 생존자가 맞고,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다”라는 상담사의 설명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됐다고 한다. ‘현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 돌아온 내가 생존자가 맞을까’라는 가학적인 질문을 털어버릴 수 있게 된 출발점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징그럽다고 느껴진 순간도 있었다”고 말했다. A씨는 사고가 발생한 골목에서 몸이 끼었지만 한 가게의 도움을 받아 압사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A씨는 “심장이 크게 뛰는 등 후유증이 있지만, 심리 상담을 통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참사 다음 날인 지난달 30일 A씨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핼러윈 분장을 하고 이태원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SNS에서 지운 것이었다.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가 인터넷에 상담 일지를 공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A씨는 “우리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했다”고 말했다.

반응은 예상외로 폭발적이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로 퍼져 나간 A씨 글에는 “같은 마음”이라며 ‘연대 선언’이 잇따랐다. A씨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본 댓글 중에서 단 하나의 악플이 없었던 건 제겐 기적”이라며 “댓글을 읽을 때마다 치유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우리에겐 잘못 없다”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에 마련된 추모공간에서 경찰이 국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시스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에 마련된 추모공간에서 경찰이 국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시스

 사고 발생 초기에는 ‘사과하고 싶은 마음’과 ‘사과받고 싶은 마음’이 A씨에게 공존했다고 한다. 심리 상담으로 자책감 등은 조금씩 덜어내고 있지만, 사과받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지고 있다. A씨는 “(젊은이들이) 놀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으니 제대로 된 사과가 없고 사과가 없다면 이런 참사는 몇 년 후에 또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참사 생존자인 그가 지목한 참사의 원인은 ‘국가’와 ‘어른들’이다. “군중 밀집에 대한 매뉴얼이 없었고, (책임자들이) 삶에 대한 다양성을 존중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A씨는 내년 핼러윈에도 이태원에 갈 계획이라고 한다. “이제라도 젊은이들에게 말해주세요. 노는 것과 이태원은 죄가 없고, 우리는 안전한 국가 속에서 마음껏 놀고 일상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것을요.”

그날의 이태원을 숨기지 않기로 한 건 A씨가 전부는 아니다. SNS에는 참사 당일 현장에 있던 이들의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A씨가 상담 일지를 통해 “그립다”고 쓴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참사 당일 이태원에서 녹색어머니회 분장을 하고 해밀톤호텔 인근에서 교통정리를 했던 함혁주(32)씨는 6일 자신의 SNS에 “10.29 이태원 그날. 부끄러울 거 없고 잘못한 거 없고 그저 안타까웠던 그날”이라는 글을 올렸다. 함씨 등 일행 15명은 교통정리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가서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현장으로 다시 돌아와 심폐소생술(CPR) 등 구조활동을 도왔다. 함씨는 이날 통화에서 “이태원과 핼러윈을 금기시하는 문화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라며 “핼러윈이나 행사 때 참여했던 사람들에겐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위험한 곳에 갔다’ ‘서양 문화다’라고 비난하는데 잘못 없는 사람들이 잘못된 비난을 피해 숨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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