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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사고, 희생자→사망자" 정부 권고…진영다툼으로 번졌다

중앙일보

입력

이태원의 골목길에서 156명이 목숨을 잃은지 닷새째 ‘이태원 참사’냐 ‘이태원 사고’냐를 둘러싼 때아닌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사고 다음 날인 지난달 30일 행정안전부가 각 시·도 지방자치단체에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를 설치할 때 ‘참사’가 아닌 ‘사고’로, ‘희생자’가 아닌 ‘사망자’로 쓰라는 공문을 내려보낸 것이 논란의 출발점이다. 이후 각종 소셜미디어서비스(SNS)에선 “책임회피를 위한 정부의 꼼수”라는 주장과 “가치중립적 표현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 맞붙고 있다.

(서울=뉴스1) 구윤성 기자 = 3일 오후 '이태원 압사 참사'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출구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뉴스1

(서울=뉴스1) 구윤성 기자 = 3일 오후 '이태원 압사 참사'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출구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뉴스1

사고·사망은 우발성에 방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 ‘사망자’는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면 ‘참사’는 ‘비참하고 끔찍한 일’, ‘희생자’는 ‘희생을 당한 사람’을 의미한다. 사고와 사망자는 우발적 사건과 그 결과를 의미하는 표현인 반면, 참사와 희생자는 사건의 가해자가 있음을 전제로 참혹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

논란이 불거지자 박종현 행정안전부 사회재난대응정책관은 지난 2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중대본 브리핑을 통해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사망자’ 표현을 쓴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재난 관련 용어는 정부부처나 지자체 등 많은 기관이 협업하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며 “압사, 참사라고 하면 (이태원이) ‘굉장히 위험한 곳인가 보다’라고 해서 관광객들이 가기를 꺼리는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3일 행안부 관계자는 “그 이상의 다른 배경은 없다”며 “행안부만의 독립적인 판단은 아니고 중대본에서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다”고 덧붙였다.

이태원 사고 관련 중대본 브리핑 (서울=연합뉴스) 박종현 사회재난대응정책관(중대본 1본부 담당관)이 2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브리핑룸에서 이태원 사고 관련 중대본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태원 사고 관련 중대본 브리핑 (서울=연합뉴스) 박종현 사회재난대응정책관(중대본 1본부 담당관)이 2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브리핑룸에서 이태원 사고 관련 중대본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용어 두고 진영 대립 양상 

 사고냐 참사냐 논쟁은 진영대립 양상을 보인다. 합동분향소에 걸린 현수막의 용어는 자치단체장이 국민의힘 소속이냐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냐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서울시가 지난달 31일부터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를 차렸지만 경기도는 기존 합동분향소 명칭을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바꿨다. 경기도에 뿐 아니라 전남·전북·제주·광주시·안양시 등 단체장이 민주당 소속인 지역에선 현수막 교체 작업이 이뤄졌다.

정부의 책임을 물고 늘여지려는 야권의 의도와 책임론을 재발 방지 논의로 전환하려는 여권의 안간힘이 용어를 달리하게 하는 모양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여객선 침몰사고’라고 말했다가 격렬한 반발이 일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둘러싼 정치적 균열이 서서히 커지고 있다.

경기도 관계자는 “지난달 29일 참사 발생 당시부터 경기도는 ‘희생자’라는 명칭을 써 왔다”며 “내부 논의에서도 ‘참사 희생자’가 더 맞는다는 의견이 많아 교체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행안부에서 분향소 표시에 대해 별도의 공문을 내린 만큼 이에 따르게 됐다”며 “굳이 예산을 다시 들여 표현을 수정하거나 그러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의 용어 선택은 대내외가 다른 꼴이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등은 공식 석상에 ‘이태원 사고’ ‘사망자’를 고집하고 있지만 한덕수 국무총리는 3일 “외신 기자들 앞에서 제가 ‘사고’(incident)라고 말한 적은 없다. ‘참사’(disaster)라고 했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 이태원 참사로 전 국민 모두가 슬픔에 빠진 가운데 2일 오후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대전 서구 대전시청 1층 로비. '이태원 사고 사망자'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서울 용산 이태원 참사로 전 국민 모두가 슬픔에 빠진 가운데 2일 오후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대전 서구 대전시청 1층 로비. '이태원 사고 사망자'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희생자 분향소만 가겠다” vs “언어 영향력 고려해야”

시민 반응도 나뉘고 있다. 직장인 이모(56)씨는 “사람 많은 곳에 갔다고 죽는다면 과연 ‘안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냐“며 “교통사고 등 일반 사고사와는 다르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참사”라고 말했다. 일부 진보 성향 커뮤니티에서도 “참사 희생자라고 쓰인 분향소에만 가겠다”는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용산구 주민 임모(52)씨는 “9.11테러도 흔히 보스턴 참사라 하진 않는다”며 “어찌 보면 이태원 주민들 역시 큰 트라우마를 겪을 텐데 언어의 영향력을 고려해서라도 참사라는 표현을 빼든 지역명을 빼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태원관광특구 상인회 측은 “지금은 추모 기간이고 상인들도 다 같이 마음 아파한다”면서도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명칭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은 자제하겠다”고 말했다.

3일 오전 전남 무안 전남도청 만남의 광장에 설치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 현수막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변경 교체됐다. 뉴시스

3일 오전 전남 무안 전남도청 만남의 광장에 설치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 현수막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변경 교체됐다. 뉴시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일과 같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대형 사고를 우리는 ‘참사’라고 한다”며 “깨져버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정부가 갖춰야 할 것은 중립적인 태도가 아닌 위로의 자세”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고·사망자 등 표현으로 사건의 규모를 축소하기보다 투명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시민들의 상처를 보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백범로 서강대학교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공간에서 한 학생이 추모에 나서고 있다. 지난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에서 150여명이 사망한 '이태원 참사'로 대학에서도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뉴스1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백범로 서강대학교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공간에서 한 학생이 추모에 나서고 있다. 지난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에서 150여명이 사망한 '이태원 참사'로 대학에서도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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