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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철에 몸 욱여넣는 K직장인 일상…압사 인식조차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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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현장 앞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이 슬픔에 잠겨 있다. 뉴스1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현장 앞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이 슬픔에 잠겨 있다. 뉴스1

“서울 사람들은 밀집 공간에 익숙하기 때문에 붐비는 이태원 거리에서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을 수 있다”(줄리엣 카이엠 전 미국 국토안보부 차관보, 지난달 30일 CNN 인터뷰)
핼러윈 주말 15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가 세계의 이목을 끌면서 해외에선 ‘군중 밀집=위험’이라는 인식의 부재가 사고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국제 사회의 지적이 잇따르자 지난 1일 윤석열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 인파 관리 또는 군중 관리라고 하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개발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밀집=위험’ 인식·연구·제도 전무

지난달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 호텔 인근 골목길에서 대규모 압사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30일 새벽 해밀턴 호텔 앞 도로가 구급차들로 빼곡하다. 우상조 기자

지난달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 호텔 인근 골목길에서 대규모 압사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30일 새벽 해밀턴 호텔 앞 도로가 구급차들로 빼곡하다. 우상조 기자

 실제로 ‘군중 밀집=위험’이라는 인식이 담긴 국내 법제도는 사실상 전무하다. 중앙정부·지방자치단체·경찰 등이 각종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할 책임을 명시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이나 경찰관 직무집행법에도 좁은 공간에 모여든 군중을 관리한다는 규정이 별도로 없다. 한승훈 동신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5조에 ‘극도의 혼잡’을 위험사태로 보고 있으나 세부 판단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포괄적인 규정이어서 공무원이 행동지침으로 삼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사람이 한데 많이 모이는 집회·시위를 규율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도 소음이나 폭력행위 등으로 인한 피해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군중의 밀집 자체를 위험으로 다루지 않는다. 다중밀집장소는 코로나19 유행으로 방역수칙에서 감염위험 요인으로 다뤄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2020년 서울시 산하 서울연구원은 ‘신종 대형 도시재난 전망과 정책방향’이라는 보고서에서 압사 사고를 미래에 발생 가능성이 있는 ‘블랙 스완(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 유형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진전된 연구나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국제경찰장협회(IACP)가 2019년 4월 발간한 ‘군중 관리(Crowd Management)’ 참고서도 있지만 우리 경찰엔 참고가 되지 못했다. 문현철 숭실대 재난안전관리학과 겸임교수는 “전문가들 사이의 논의는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밀집이나 다중 인파에 대한 위험 공감도가 낮다 보니 제대로 된 준비나 대비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최명기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단 교수는 “통행할 때 보통 40㎝ 폭이 필요(1m당 약 2명)한데 이번같이 인파가 한곳에 몰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연구나 데이터가 국내에는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 특성상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를 통제한다고 하면 자유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여 반발했을 것”(집회·시위 관리 담당 경찰관)이라는 견해도 있다.

“국가적 인식 전환 필요”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해외 주요 국가들은 나름의 군중 관리 매뉴얼을 시행하고 있다. 미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2005년 ‘특별 행사 비상계획’을 만들어 야외 인파 운집 상황 통제의 기준을 제시했다. 1인당 최소 0.37∼0.46㎡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워싱턴포스트(WP) 등 미국 주요 언론은 전문가 견해를 토대로 밀집도가 1㎡(제곱미터)당 5명을 넘으면 ‘위험 수준’에 달한 것으로 분석한다. 일본에선 107쪽에 이르는 효고 경찰본부가 만든 ‘혼잡경비 매뉴얼’이 전국에 통용되고 있다. 군중 운집시 일방통행을 유도하는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 기준과 지침이 담겨있다. 중국은 2015년 4월 국가관광국이 행사 현장의 최대 수용 인원을 책정해 특정 시간대에 군중이 몰리는 현상 자체를 통제한다. 영국 안전보건청(HSE)은 ‘인파의 교차’ 등을 위험으로 규정하고 경찰관 등에게 이를 막기위한 폭넓은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 홍콩은 핼러윈 행사 때마다 경찰이 인파의 흐름을 관리하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김병식 강원대학교 방재전문대학원 교수는 “외국은 대형 압사 사고들을 겪으면서 크라우드 매니지먼트에 대한 연구도 제도도 발전해 왔다”며 “한국에서도 1992년 뉴키즈온더블럭 내한 공연 압사사고, 2005년 상주 시민운동장 압사사고 등이 있었지만 재난 관리라는 차원으로 문제의식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요 국가들의 군중 관리 매뉴얼은 압사 참사의 아픔을 딛고 탄생했다. 영국에선 1989년 리버풀 축구 팬 96명이 축구장의 혼란 속에서 압사했고, 홍콩에선 1993년 핼러윈 때 21명이 압사했다. 일본은 2001년 효고 아카시에서 열린 불꽃놀이 때 11명이 압사하는 충격을 겪었고 중국에선 2014년 신년 행사에 모인 군중에서 3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국가적인 인식의 전환이 매뉴얼 마련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현철 숭실대 재난안전관리학과 겸임교수는 “서울 한복판에서도 대형 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식하고 안전 확보를 위해서라면 차량 통제에 적극 협조하는 등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태도가 시민 철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허억 가천대 국가안전관리대학원 교수는 “인파 관리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던 나라라는 점을 자각하고 ‘설마’라는 안일함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태원 참사 인터넷 추모 게시판 등에는 “일상으로 받아들인 무뎌진 감각이 부른 참사” “몸이 부딪히고 밀리는데 경각심이 부족했다” “만원 지하철에도 몸을 욱여넣는 게 ‘K-직장인’의 자세”라는 등 일상적인 과밀 환경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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