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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10월 수상작] 서정성 짙은 언어, 단시조의 묘미 보여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7면

장원

하루를 닫는 시간
김경숙

흔들리는 하루가
가지 끝에 매달려

울지 못한 시간을
밤 깊도록 깁는다

다 못 쓴 내 젖은 언어는
눈이 부은 그믐이네

◆김경숙

김경숙

김경숙

청송초등학교 근무.
제2회 우포백일장 차상
제2회 역동시조공모전 차상

차상

도토리거위벌레
조현미

바람도 잠든 숲속 고요 깊은 한낮에
벌레들 톱을 켠다, 나뭇잎이 듣는다
길둥근 나래를 펴고 꽃 이울듯 사뿐하게

단단한 둘레 중심 화인처럼 찍힌 점이
내밀한 정표 같아 배꼽을 똑 닮아서
한 줄금 먼지잼에도 마음 먼저 젖는 날에

탯줄 자른 자리에 길은 또 새로 움터
무른 살 먹고 자란 어미의 딸 어미들이
불멸의 신화를 쓴다, 수억 년째 서사시를

차하

할미꽃
김영수

시집 온 첫 여름에 지아비를 잃은 강산
원망도 버릇처럼 웃음으로 만개하며
덜 아문 포탄 자국의 멍을 풀어 피는 꽃

풍진 세사 떠안은 채 포성 소리 덧댄 세월
자줏빛 송이마다 귀를 세운 오지랖이
백발로 꼬부라지는 한 생애의 눈물꽃

이달의 심사평

10월은 수확의 달이기도 하다. 처음 시상을 얻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언어적 조탁을 거쳐 한 편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것 또한 땅을 갈고 씨를 뿌려 물을 주고 길러서 열매를 수확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달의 장원에 ‘하루를 닫는 시간’(김경숙)을 앉힌다. 단시조의 묘미를 잘 보여주는 단정한 작품으로 언어의 미적 가공의 과정을 잘 거쳤다고 하겠다. 서정성 짙은 제목부터 미학적 힘을 거느리고 있다. 하루가 끝나는 밤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면서 닿지 못할 갈망에의 상처 입은 내밀한 정서를 잘 다스린 사유의 언어로 조탁하였다.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들도 오랜 습작을 짐작하게 하여 미더움이 더했다는 점을 밝힌다.

차상에는 ‘도토리거위벌레’(조현미)를 올린다. 딱딱한 도토리에 주둥이로 구멍을 내어 거기에 알을 낳는 도토리거위벌레의 번식과 생존에서 세상 모든 어미들이 지닌 본능적인 강인한 생명력을 겹쳐놓았다. 어미벌레가 도토리에 뚫은 구멍을 배꼽으로, 그 탯줄 자른 자리에서 이어지는, “어미의 딸 어미들”이 쓰는 “불멸의 신화”로 확장해 나가는 솜씨가 돋보이는 깊이 있는 작품이다. 어떤 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오래 천착하고 매달린 힘이 느껴진다.

차하로 뽑힌 ‘할미꽃’(김영수)은 시골 들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미꽃을 “덜 아문 포탄 자국의 멍을 풀어 피는 꽃” “백발로 꼬부라지는 한 생애의 눈물꽃”으로 진술하였다. 전쟁으로 일찍 지아비를 잃은, 이 땅의 아픈 역사 속 한 여인의 생을 끌어옴으로써 진술의 시적 진정성을 확보하였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한장의 네 음보(마디) 길이가 모두 같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조는 특히 시어와 시어, 장과 장이 조응함과 동시에 서로 긴장하는 정교한 구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응모해 온 모든 분께 강조하면서, 유인상·윤영화·조우리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시조시인 김삼환·서숙희(대표집필)

초대시조


인은주

그러지 말자 하고 기다리다 들뜬 저녁
그이는 오지 않고 노을이 덮쳤다
넘어진 무릎 아래로 붉은 피가 모였다
핏빛이 붉어야 하는 그 이유를 아는 순간
노을은 다급하게 어둠과 섞이고
이 세상 다 무너진 듯 돌아보지 않았다

◆인은주

인은주

인은주

충남 당진 출생. 2013년 ‘시조시학’으로 등단. 시집 『미안한 연애』 『우리의 관계는 오래되었지만』 등.

사람들은 살면서 얼마나 많은 멍을 만나는가. 팔목, 무릎, 눈 등에 나타나는 붉거나 퍼렇거나 또는 그것들이 뒤섞여 있는 피의 웅덩이. 그것은 어떤 충격의 표징으로 피부 표면 아래에 생기는데 대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시간이 이를 지워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마음의 멍이다. 몸에 생기는 것보다 더 붉고 더 퍼런 이 웅덩이는 점점 커지고 무거워진다. 그 무게와 부피로 어떤 이는 한평생 그것에 짓눌려 살고 어떤 이는 자신을 버리기까지 한다. 누군가의 말이나 눈빛, 행동 하나가 만든 비애다.

이 작품에서 그것을 만나게 되는데 먼저 “그러지 말자”라는 체념의 말로 쿵, 가슴을 내려앉게 한다. 기다림, 저녁, 오지 않는 그이, 넘어짐, 무릎 아래에 모인 피, 핏빛, 어둠, 세상 무너짐. 돌아보지 않는 것. 이 한 편의 시 속에 이 세상 슬픈 단어들이 다 모여 있는 듯하다. 그 슬픔은 멍으로, 그러다가 노을로 묘사되어 구체화된다. 하루가 넘어져 저녁을 맞게 되고 결국 “다급하게 어둠과 섞이”는 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핏빛이 붉어야 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급하게 어둠과 섞이는” 노을처럼 무엇으로나 어떤 것으로 넘어가야 하는 극적 장치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 ‘피’의 상징성이 너무나 강렬하므로?

하지만 일찍이 노을 앞에 섰던 이영도 시인은 그의 수필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1966년)을 통해 노을의 색이라는 모색(暮色)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같은 빛, 기도의 자세”라고 했다. 이는 노을에 대한 보편적 정서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시의 결구인 “돌아보지 않았다”라는 강한 부정의 말은 ‘돌아보았다’라는 반어적 의미가 아닐까.

내 안의 ‘멍’을 살펴보고 돌아보게 하는 시조이다.

강현덕 시조시인

◆응모안내

다음달 응모작은 11월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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