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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11월 수상작] 섬세하게 포착한 인간의 삶, 자연의 숨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7면

장원

신도시 폐가
홍성철

무너진 지붕 한쪽 황톳빛 처연하다
셈평 펴인 주인은 도시 생활 흔전대고
쫓겨난 길고양이가 새끼 낳고 사는 곳

잡초 마당 한구석 널브러진 경운기는
식구들 건사하다 삭아버린 가장이다
내 건너 아파트 숲을 미워하다 누웠고

신도시가 마뜩잖은 늙은 감나무는
올해도 주렁주렁 옛날 얘기하는데
울 밖의 두꺼비들이 새집 달라 보챈다

◆홍성철

홍성철

홍성철

동아대 법학과 졸업. 2020년 부산시조시인협회 시조창작 과정 수료. 2021년 10월 중앙시조백일장 차하.

차상

미생은 어느날
김미영

사직을 권하는 척, 형체 없는 날 선 톱에
피 한 방울 없이 자리 하나가 잘려졌다
던져진 그녀의 이름표만 쓸쓸히 웃는데

정리된 사물함엔 빛바랜 유니폼
얼룩진 손거울이 동그마니 마주하고
마지막 ‘수고하세요’만 종일토록 붉은데

모퉁이에 밀려난 텅 빈 책상을 보며
내게도 올 불안에 내게는 안 온 다행에
내 쉬는 한숨의 정체, 밥벌이의 이 무게

차하

김장
윤영화

절임이란, 잊고 산 걸
한 통 꺼내 간 보는 것

흙에 묻힌 엄니 생각
뽑아 들고 헹구다가

눈물 그,
노란 속잎에
그리움을 칠하는 것

이달의 심사평

1년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중앙시조백일장도 한 해를 마감하는 달이다. 작품을 투고해준 예비시인들의 분투 노력이 고맙고, 뜨거운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신 독자들께 감사한다. 내년에도 변함없이 퇴고와 단련에 쏟을 노력이 기대되고, 지도 편달과 성원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달의 장원에는 홍성철의 ‘신도시 폐가’를 올린다.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기존의 집들은 하나둘 순서를 가려 허물어진다. 폐가를 보는 화자의 눈길이 연민으로 가득하다. “무너진 지붕 한쪽”엔 길고양이, 잡초가 우거진 마당엔 “널브러진 경운기”, “신도시가 마뜩잖은 늙은 감나무”와 “새집 달라 보채”는 두꺼비 울음소리까지 인간의 삶과 자연의 숨소리를 섬세하게 관찰하는 화자의 마음도 함께 허물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처연”으로 시작해서 “새집”으로 끝내는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다. 그것은 희망이다. 새집에 대한 희망이 어찌 두꺼비뿐이겠는가!

차상으로는 김미영의 ‘미생은 어느날’을 선했다. 연말을 앞둔 스산한 계절이다. ‘미생’이라는 시어가 품고 있는 의미는 언제인지 그 시기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다. “피 한 방울 없이 자리 하나가 잘려”지는 냉혹함이다. 직장인의 애환은 “밥벌이의 이 무게”를 견뎌야만 하는 삶의 고투이다. 그런 현실적 삶을 노래하며 안고 보듬고 달래는 것이 시의 운명이니 어쩌랴!

차하에는 윤영화의 ‘김장’을 뽑았다. 김장과 절임의 의미를 새롭게 표현했다. 간을 보고 헹군 다음에 “노란 속잎에 그리움을 칠하는 것”이 바로 김장이다. 단수 시조의 묘미를 간파한 김장김치 맛이 신선하다.

김은생·남경민의 작품을 오래 읽었다. 기본기가 충분하므로 내년을 기대하며 계속 정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심사위원: 김삼환(대표집필)·서숙희

초대시조

오늘은 처음이니까
김보람

오늘을 늘어놓고 오늘을 기다린다
오늘을 쓰는 내겐 오늘이 처음이니까

이름은 잘 있습니까?
이런 질문 이런 밤

어떤 손이 나타나 얼굴을 더듬는다
무엇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하루를 앞질러 걸어와
기울어지는 첫 문장

◆김보람

김보람

김보람

경북 김천 출생.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등.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우리는 늘 “오늘”을 기다렸다가 오늘을 쓴다. 다 쓰고 나면 또 다른 오늘이 와 주기에 우리의 오늘은 항상 넉넉하다. 그런데 이것은 늘 “처음”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손이 나타나 얼굴을 더듬”고 그것은 “무엇이 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라며 긴장과 불안의 마음을 내비친다. 처음인 것들은 늘 가깝거나 먼 미래와 이어져 있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그 영역이 확장되는 특징도 있는데 보통은 ‘나중’이거나 ‘계속’이라는 말로 지속성을 보여주다가 ‘끝’이라는 상황에서 마무리되기도 해 마음을 더 조인다. 자주, 편하게 쓰는 말이라 아름다움과 조심스러움을 함께 담고 있는 유리병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묻는다. “이름은 잘 있습니까”하고.

그래도 ‘처음’이라는 말의 냄새는 대체로 좋다. ‘대체로’라고 단서를 단 것은 나쁠 때도 쓰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대체로 낯선 풋풋함을 지니고 있다. 낯선 것은 심장을 쫄깃거리게 하고 풋풋한 것은 쿵쿵 뛰게 한다. “기울어지는 첫 문장”은 그래서 더 신선하다.

누구는 세상이 너무 익숙하다고 그 익숙함이 지루하다고 일탈을 일삼기도 한다. 아이들은 매일 매일이 똑같아서 일기 쓸 거리가 없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늘 처음인 것들로 다시 찬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처음 만나는 것들이다. 흐르는 강물은 말할 것도 없겠고 늘 그 자리에 박혀 있는 바윗돌조차 바람이나 햇빛 등에 의해 조금씩 다른 얼굴을 보인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웃음도 늘 새로운 것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누군가의 발자국도 언제나 첫발자국이다.

강현덕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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