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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신(新) 희망적 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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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1 올해 일본 프로야구 우승팀 야쿠르트의 오가와 주장은 우승이 결정된 날 3만여 명의 홈 팬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팬들에게 외친 마지막 한마디. "사·랑·해·요." 한국어 인사에 팬들은 환호했다.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에서 우승한 야쿠르트 스왈로즈팀 오가와 주장이 지난달 홈구장 팬들 앞에서 한국어로 "사랑해요"를 외치고 있다. 사진 TV아사히 캡처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에서 우승한 야쿠르트 스왈로즈팀 오가와 주장이 지난달 홈구장 팬들 앞에서 한국어로 "사랑해요"를 외치고 있다. 사진 TV아사히 캡처

한국에 싸늘한 논조를 유지하던 A신문사의 최근 논설위원 회의. "한국이 일본에 전향적으로 나오는데, 우리도 좀 스탠스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공감대는 실제 사설의 변화로 이어졌다. 놀라운 변화다.

이 때문인지 주일대사관과 외교부 관계자들은 "일본 반응이 많이 달라졌다"고 자찬한다. 곧 일본이 한국에 손을 벌려 한·일 관계가 다 풀릴 것처럼 낙관하는 분위기마저 있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외교 여전해
대일 외교·전술핵 낙관 근거 있나
엑스포 활동도 포인트 잘못 짚어

 하지만 정말 그럴까. 냉정하게 보면 립서비스만 난무할 뿐, 일 정부·자민당의 몽니는 그대로다. 징용자 배상 문제도 한·일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미국의 다그침에 마지못해 협상에 응할 뿐, "배상은 없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다.

조현동 외교부 제1차관(왼쪽)이 25일 오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주일한국대사관

조현동 외교부 제1차관(왼쪽)이 25일 오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주일한국대사관

정권 출범 당시 한국 스스로 ▶징용자 배상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수출 규제 ▶군사정보보호협정 ▶초계기 레이더 사건 ▶후쿠시마 수산물 문제 등을 원샷에 해결하자는 '그랜드 바겐'(일괄타결) 방식을 못박아 버리는 바람에 역으로 뭐 하나 해결이 안 되는 모순에 빠졌다.

기시다 총리의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건너지 않는' 정치 스타일, 일본 관료조직의 중층(重層)구조를 간과한 결과다. 그저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늘 지적됐던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 탓이다.

 #2 윤 대통령은 지난 8월 방한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과 휴가를 이유로 만나지 않고 통화만 했다. 대통령실에선 "펠로시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했다. 급거 마련된 전화 통화에 대해선 "펠로시가 흔쾌히 감사하다 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8월 4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방한 당시 휴가중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은 전화통화로 면담을 대신했다. 연합뉴스

지난 8월 4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방한 당시 휴가중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은 전화통화로 면담을 대신했다. 연합뉴스

과연 그랬을까. 한국에 이어 일본에 왔던 펠로시를 만난 고위 인사는 최근 "펠로시가 한국에 매우 화나 있었다"고 전했다. 우리 발표와는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우리 당국에도 전해졌는데, 반응은 "원래 펠로시가 화가 많은 분이라 그런 거 아닌가요"라는 황당한 것이었다고 한다. 펠로시를 만나지 않았던 결정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이런 희망적 사고가 절망을 초래한다.

 핵 공유 및 전술핵 재배치 논란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이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꼼꼼하게 따져보고 있다"고 운을 띄우자 미국은 바로 "미국의 정책은 달라진 게 없다"고 일축했다.

두 가지다. 첫째, 우리가 핵 정책 변화를 진지하게 마음에 두고 이런 말을 했다면 어처구니없는 실책이다. 영글지도 않은 핵 정책을 공론화하는 순간 미국이 "우리도 검토하겠다"고 나설 희망(가능성)이 진짜 있다고 본 걸까. ▶핵 보유 혹은 배치의 논리 개발 ▶주변국의 압박과 제재 대응 방안 등을 물밑에서 미국 측에 극비리에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설득해도 될까 말까 한 얘기다. 그걸 대통령의 입으로 말해버렸다.

둘째,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거라면 진짜 아무 생각이 없는 정부다.

 #3 끝으로 부산엑스포 유치 활동. 우린 "엑스포·올림픽·월드컵의 3대 메가 이벤트를 모두 개최하는 일곱 번째 국가"라고 홍보하지만, 요즘 시대에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는 얼마 없다.

또 "소프트파워와 한류 확산에 기여할 것"이라고 호소하지만 엑스포가 없어도 이미 세계는 충분히 한류 파워를 느끼고 있다. 뭔가 포인트를 잘못 짚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의 희망적 사고와 세계의 감각은 다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31일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30 부산엑스포 유치지원위 전략회의 및 민간위 출범식에서 기업인들과 두손을 모으고 부산엑스포 유치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31일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30 부산엑스포 유치지원위 전략회의 및 민간위 출범식에서 기업인들과 두손을 모으고 부산엑스포 유치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 하나의 우려. 요즘 일본에 오는 정치인이나 기업인, 공무원마다 똑같은 일본 인사를 만나 똑같은 부탁을 반복한다. 이게 과연 도움이 될까.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또 하나의 '대한국 외교 카드'를 일본에 쥐여주게 되는 역효과는 생각 안 해 봤는지. 2006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선출 때도 그랬다. 일본은 질질 카드를 쥐고 있다 결국 반대표, 기권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