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합니다. 여기 계신 모두/ 야한 작품을 기대하셨다면/ Oh I’m sorry 그딴 건 없어요.”
(여자)아이들 신곡 음원차트 정상 #'톰보이' 이어 2연타 흥행 성공
그룹 '(여자)아이들'이 지난 17일 발표한 ‘누드’ 가사다. 미니 5집 ‘아이 러브(I love)’ 발매를 앞두고 섹시 콘셉트의 티저 이미지까지 공개했지만 대중이 걸그룹에게 기대한 이미지를 보기 좋게 뒤집은 것.
발매 당일 서울 CGV 청담 씨네시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리더 소연은 “‘누드’라는 단어가 외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저는 벗겨진 게 아닌 그대로의 나라고 생각했다. 화장한 모습이 아닌 민낯이 진짜이지 않냐”며 “나의 진짜 모습을 입은 나”라고 정의했다.
영어 스펠링을 ‘Nude’가 아닌 ‘Nxde’라고 표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같은 파격에 힘입어 ‘누드’는 한 달 가까이 장기 집권하던 지코의 ‘새삥’을 밀어내고 멜론 등 음원 차트 1위에 올랐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이들이 의도한 바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멤버 5명 모두 금발로 염색하고 핀업 걸 같은 의상을 입고 물랑 루즈를 연상케 하는 무대에 오른다. 앨범 프로듀싱을 맡은 소연은 “매릴린 먼로는 금발의 미녀, 백치미, 섹스 심벌 이미지로 소비됐지만 철학적인 것도 굉장히 좋아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며 “겉모습에 대한 편견이 시대 별로 있지 않나. 우리 역시 연예인으로서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오마주 이유를 밝혔다. 영상 말미에는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에 사람들이 몰려들자 이를 분쇄해버리는 영국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를 오마주한 듯한 장면까지 등장한다.
“섹스 심벌로 소비된 먼로 오마주”
프로듀서로서 소연의 역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3월 정규 1집 타이틀곡 ‘톰보이(TOMBOY)’로 올 상반기 써클차트 디지털차트 2위에 오르는 등 메가 히트를 기록한 터라 후속작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았을 텐데 그는 6월 시작한 월드투어 전에 완성해 놓은 앨범이라고 밝혔다.
“‘톰보이’ 이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해 순조롭게 작업했다”는 설명처럼 "I’m not a doll(난 인형이 아니야)"이라는 가사와도 세트처럼 이어진다. CD에만 수록된 버전에는 “미친 *이라 말해” “I’m f***ing Tomboy” 등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수진이 학폭 논란으로 탈퇴하고 MBC ‘방과 후 설렘’ 경연곡(‘썬’) 표절 논란이 불거지는 등 위기에 처했지만 이를 전화위복 삼아 더 날카롭게 칼을 벼린 셈이다.
써클차트 김진우 수석연구위원은 “걸그룹도 남성보다 여성 팬층이 탄탄해지면서 걸크러시의 의미도 확대되고 있다”며 “(여자)아이들은 2018년 데뷔 초부터 꾸준히 주체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내면서 스펙트럼을 넓혀온 팀”이라고 분석했다.
‘아이 러브’ 발매 첫 주 앨범 판매량은 67만장을 기록해 3월 정규 1집 ‘아이 네버 다이(I NEVER DIE)’ 17만장보다 4배 가량 늘었다. YG의 블랙핑크를 필두로 SM의 에스파, JYP의 있지, 스타쉽의 아이브 등 걸그룹도 밀리언셀러 시대를 맞았지만, (여자)아이들은 큐브 소속으로 레이블 후광 효과 없이 계단식 성장을 이루고 있어 더욱 눈에 띈다. 큐브는 포미닛ㆍCLC 등 자기 색깔이 뚜렷한 걸그룹을 배출해왔다.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샘플링 활용법도 독특하다. 오페라 ‘카르멘’의 아리아 ‘하바네라’의 멜로디를 차용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 캄파넬라’를 샘플링한 블랙핑크의 ‘셧 다운(Shut Down)’이나 1970년대 디스코 글로리아 게이너의 ‘아이 윌 서바이브’를 샘플링한 아이브의 ‘애프터 라이크(After Like)’가 음악적 결합이라면, ‘누드’는 집시 여인 카르멘의 스토리와도 맞물린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는 “(여자)아이들은 에스닉한 음악을 시도하는 등 K팝의 공식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으면서도 대중을 혹하게 하는 요소를 잘 짚어낸다”며 “어느 때보다 메시지가 강한 곡으로 여성 창작자로서 다양한 담론을 끌어내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프로듀서 입지 다져…걸그룹 진일보”
데뷔 전부터 Mnet ‘프로듀스 101’ ‘언프리티 랩스타 3’(2016) 등 다양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실력을 뽐내면서 소연에게 하이라이트가 집중돼 있지만 다른 멤버들의 성장도 주목할 만하다.
소연은 이번 앨범에 수록된 6곡 전곡 작사 혹은 작곡에 참여하고, 중국 출신 우기와 태국 출신 민니가 각각 2곡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우기는 “데뷔 앨범 빼고 두 번째 싱글부터 전곡 자작곡으로 만들고 있다”며 자부심을 보였다. 김윤하 평론가는 “민니는 최근 팝 트렌드를 세련되게 녹여내고, 우기는 감성적인 부분이 도드라진다”며 “전체적인 앨범 밸런스가 좋은 편”이라고 짚었다.
보이그룹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프로듀싱 영역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박희아 대중음악평론가는 “EXID의 LE나 달샤벳의 수빈 등 기존에도 곡을 쓰는 걸그룹 멤버가 있었지만 퍼포먼스 등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했다”며 “(여자)아이들의 소연은 작사·작곡부터 퍼포먼스까지 제작 전반에 참여해 일관적인 톤 앤 무드를 만들어내면서 K팝 걸그룹의 진일보를 이뤄냈다”고 말했다.
이어 “2019년 ‘퀸덤’ 파이널에서 선보인 ‘라이언(LION)’ 무대처럼 지금 K팝을 소비하는 여성 팬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며 “10대 팬들이 닮고 싶은 워너비처럼 여긴다면 30대 팬들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에 해방감과 통쾌함을 느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