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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후가 부른 공급망 위기] 미 한파에 놀란 삼성전자, 공장 짓기 전 가뭄 대비책 매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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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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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요 기업들이 RE100 달성을 목표로 재생에너지 사용량 증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가 태양광 패널 설치에 나선 중국 공장 전경. [사진 SK아이이테크놀로지]

국내 주요 기업들이 RE100 달성을 목표로 재생에너지 사용량 증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가 태양광 패널 설치에 나선 중국 공장 전경. [사진 SK아이이테크놀로지]

삼성전자는 지난해 2월 기록적인 한파로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공장 가동을 6주 동안 중단, 3000억원대 손실을 입었다. 이후 언제 덮칠지 모를 이상기후에 적극 대비 중이다. 최근 미국 테일러 공장 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록적인 가뭄이라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용수 공급 문제부터 일찌감치 매듭지었다. 지자체인 테일러시 윌리엄슨카운티가 인근의 마일럼카운티에서 용수를 끌어오도록 협상해 타결시켰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공장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쉬지 않고 가동돼야 해서 이상기후로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네이버도 올해 경기도 분당에 문을 연 두 번째 사옥에 태양광 발전 패널과 함께 빗물 재활용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상기후로 폭우 빈도가 늘자 에너지 절감을 위한 빗물 재활용의 중요성이 커진 때문이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기후위기는 이제 국가 경제와도 직결된 중요한 문제가 됐다”며 “특히 수출 기업 사이에선 이상기후 극복이 전 세계를 덮친 공급망 위기 극복의 열쇠 중 하나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런데 기업들이 신경 쓰는 것은 눈앞의 공급망 문제 외에도 하나가 더 있다. 바로 ‘RE100’(Renewable Energy 100) 가입이다. RE100은 기업에서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한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하는 글로벌 캠페인이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상기후에 대비해 탄소세 부과 등 규제 움직임이 확산하면서 재생에너지 사용량을 늘려야 한다는 기업들의 절박감도 강해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외신 등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글로벌 RE100 가입 기업 숫자는 381곳. 그중 한국 기업은 23곳이다. 7월 기준 미국 95곳, 일본 72곳, 영국 48곳 등과 격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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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RE100 가입의 포문을 연 곳은 SK그룹이다. 2020년부터 국내 최초로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 등 주요 계열사가 RE100 가입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이행 계획도 내놨다. SK하이닉스는 전력 사용량이 많은 반도체 제조사라는 악조건을 딛고 2030년까지 모든 사업장 사용 전력의 33%를 재생에너지로 대체, 2050년 RE100을 달성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가 올해 펴낸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의 지난해 재생에너지 사용량은 259만7398GJ(기가줄)로 2020년(27만5990GJ) 대비 10배 가까이 늘었다. 반도체 생산 공장이 없는 미국 법인은 지난해 RE100을 달성하기도 했다.

한국 재생에너지 비중 7.5%에 그쳐

지난해에는 LG에너지솔루션과 롯데칠성음료, 아모레퍼시픽, 고려아연 등이 RE100에 가입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와 미국 공장에서 이미 RE100을 달성했다. 올해 재생에너지 전환 비율 60% 이상 확대, 2030년까지 모든 사업장의 RE100 달성이 목표다. 최근 폐배터리 재활용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폐배터리에서 리튬과 니켈 등의 핵심 소재를 추출해 재활용하면 이들 소재의 신규 채굴 필요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채굴할 때의 탄소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2040년 RE100 달성을 목표로 한 롯데칠성도 일부 제품의 페트병 무게를 기존 대비 10%가량 줄였다. 이로써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을 116t 줄인다는 계획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올해는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현대위아), KT, 네이버 등이 RE100 가입에 가세했다. 지난해 전체 전력 사용량 가운데 재생에너지 비중이 16.3%(약 1900만GJ)에 달한 삼성전자는 2050년 RE100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 해외 사업장에선 2020년 이미 RE100을 달성했다. 현대차는 아산공장과 울산공장에 각각 설치한 태양광 발전 설비를 통해 연간 2만5500㎿h(메가와트시)의 전기를 자체 생산하고 있다. 다만 이는 완성차 생산 공장 가동엔 부족한 전력량이라 보완이 필요하다.

RE100 달성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인 손실과 시간 허비 등 시행착오도 만만찮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롯데칠성은 지난해 전력 사용량을 모두 재생에너지로 전환한다고 가정할 경우 연간 영업이익의 28%에 달하는 525억원가량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은 녹색프리미엄 제도 활용과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구매, 제3자 전력구매계약(PPA) 등 정부가 지난해 도입한 방식을 통해 재생에너지를 합리적으로 확보하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녹색프리미엄은 기업들이 한국전력공사로부터 전체 전기를 구매할 때 추가요금(프리미엄)을 지불, 이 금액만큼 재생에너지 사용량을 늘려 공식 인증 받을 수 있는 제도다. 재생에너지 발전소에 대한 지분 확보 등 직접 투자나 현대차의 일부 공장처럼 자가 발전 방식으로 재생에너지를 확보하려면 많은 비용·시간이 들지만, 녹색프리미엄으로는 비용·시간을 훨씬 덜 들이면서도 재생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이런 녹색프리미엄을 통해 지난해 국내 사업장에서 총 20만8350㎿h의 재생에너지를 공급 받았다.

REC는 정부가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용량이 500㎿(메가와트) 이상인 발전 사업자에 발급하는 인증서다. 이 REC는 일반 기업이 현물시장을 통해 단기 구매하거나 계약을 통해 장기 구매할 수 있다. REC 구매는 녹색프리미엄과 마찬가지로 직접 발전소에 투자하거나 발전소를 짓는 것보다 비용·시간 면에서 이점이 있다. 그러나 둘은 RE100을 달성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의 재생에너지를 확보하긴 어려운 방식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여력이 있는 기업들은 PPA 방식에 더 집중하고 있다.

PPA는 한전의 중개로 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자가 일반 기업에 직접 전기를 판매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룹 내에 재생에너지 발전을 하는 계열사를 둔 대기업의 경우엔 이 PPA 방식이 유리하다. 해당 계열사를 통해 재생에너지를 직접 조달하면서 실적도 챙기고, 비용·시간 소모도 최소화할 수 있어서다. SK E&S와 SK에너지 등의 계열사를 둔 SK그룹, 한화솔루션을 통해 태양광 발전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는 한화그룹 등이 이 같은 경우다. 다만 거꾸로 보면 이 정도의 여력을 사전에 비축한 대기업이 아닌 이상 PPA도 제한적인 선택지라는 얘기도 된다.

녹색기업 위장하는 ‘그린 워싱’ 기승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자가 발전으로 재생에너지를 계속 확보해나가는 게 기업의 RE100 달성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진단한다. 자가 발전을 위한 설비 투자에 드는 초기 비용과 성과를 얻기까지 최소 4~5년의 시간이 필요한 점 등을 고려하면 기업들이 당장 추진하기엔 부담이 크지만, 장기적 관점에선 결국 필요한 일이라는 얘기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 무엇보다 기업들이 자가 발전과 직접 공급에 전념할 만한 환경 조성이 선행돼야 하는 상황”이라며 “아직까지 경제성의 문제 때문에 그게 거의 불가능한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예컨대 현재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는 미국이나 중국 대비 두 배 이상 비싸다. 비좁은 국토에서 재생에너지 수요에 비해 공급을 위한 발전 설비가 태부족해서다. 삼성전자와 LG에너지솔루션 등이 해외 사업장에선 RE100을 이미 달성한 반면 국내에선 갈 길이 먼 것도, RE100에 가입한 국내 기업 숫자가 선진국 대비 많이 뒤처진 것도 그래서라는 분석이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글로벌 사업장에서 사용한 재생에너지는 5278GWh(기가와트시)였는데 한국에선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500GWh뿐이었다.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지난해 7.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30%)의 4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이에 일부 기업들이 ‘녹색기업임은 대외적으로 어필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미미한 친환경 성과를 내고 있는 괴리’ 속에 무리수를 두는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는 녹색기업이 아니지만 마치 녹색기업인 것처럼 과장 또는 허위 홍보하는 이른바 ‘그린 워싱’이 대표적이다. 지난 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환경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6년부터 올해

8월까지 약 7년간 녹색기업이 환경법규를 위반한 사례는 142건(108개 사업장)에 달했다. 2016년 이후로 오염물질 배출량 측정 자료 조작 등의 심각한 사유로 녹색기업 지정이 취소된 사업장도 27곳이나 됐다.

그러면서 정부가 지정하는 녹색기업 숫자도 2016년 165곳에서 올해 8월 105곳으로 크게 줄었다. 반면 해외 기업들은 빠른 재생에너지 확보를 통한 RE100 조기 달성에 성큼 다가선 상태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애플·구글이 천명한 RE100 달성 시점은 2030년으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목표연도인 2050년이나 현대차의 2045년보다 15~20년 앞선다. 실천부터 앞선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MS는 2012년부터 탄소중립 정책을 시행했고 2019년부터는 기존 사내 탄소세를 2배로 늘려 부과했다. 2020년엔 데이터센터 사용 전력의 6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데도 성공했다.

구글은 도심에서 탄소배출량을 추적해 저감할 수 있는 ‘디지털 툴(Tool)’을 개발해 호평 받았다. 아마존은 내년부터 배송 차량을 전기차로 공급하기로 했다. 중국도 알리바바가 203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물류 차량을 전기차로 교체하고, 징동닷컴이 12개 물류 단지에 태양광 발전 설비를 갖추면서 연간 40만t의 이산화탄소를 감축하는 등의 성과를 내고 있다. 코트라 관계자는 “중국은 탄소중립을 향한 발걸음이 미국·유럽 등에 비해 초기 단계에 머물렀지만 지난해부터 정보기술(IT) 분야의 선도 기업들을 중심으로 구체적 실천 방안이 적극 마련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준신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한국도 정부가 PPA에 드는 계통연계비용(한전의 전기 설비를 위해 소요되는 비용) 부담이나 태양광 발전 설비의 과도한 이격거리(안전을 위해 띄우는 거리) 규제를 완화하는 등 실효성 있는 정책들로 기업들이 선진국 수준의 ‘친환경 속도전’에 나서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자금력의 한계로 녹색기업으로의 전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다수 중소기업의 비용 부담 경감을 위해 정부가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 제공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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