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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없이 16년 통치...특별한 게 없어 특별한 정치인[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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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

우르줄라 바이덴펠트 지음
박종대 옮김
사람의집

재임 16년(2005~2021)의 4선 최장수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물러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메르켈이 총리로서의 공과 과를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가 자신의 바람대로 평범한 시민으로 되돌아간 뒤 메르켈리즘을 조명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 책 『앙겔라 메르켈(Die Kanzlerin·여성 총리)』의 독일어판은 지난해 메르켈 집권 황혼기에 나왔다. 저널리스트인 우르줄라 바이덴펠트가 현대 독일 정치사에서 메르켈이 차지했던 특수한 위치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메르켈의 성공은 물론 실수까지 하나하나 중립적으로 객관적으로 치밀하게 들춰냈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해 봐야 할 덕목들이 백화점처럼 진열돼 있다.

앙겔라 메크켈 전 독일 총리가 지난 7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나 프랑크 하우스를 방문해 서명을 남기는 모습. AP=연합뉴스

앙겔라 메크켈 전 독일 총리가 지난 7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나 프랑크 하우스를 방문해 서명을 남기는 모습. AP=연합뉴스

 메르켈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지나치게’ 신중한 총리였다. 힘든 일이 생기면 너무 늦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모두가 지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렸다가 최후의 순간에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독특한 ‘망설임의 원칙’은 약점이기도 했지만 최대 강점이기도 했다. 그는 ‘기다림의 능력’의 화신이었다.

 콜 총리가 연루된 1999년 기민련의 정치기부금 스캔들, 2008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유럽의 재정위기, 2016년 난민사태, 2018년 기민련 당 대표 사임, 2021년 정계 은퇴 선언 때도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아찔한 ‘스프링보드’에서 뛰어내렸다. 신중하게 기다리는 대신 전문가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고 여론을 면밀히 살폈다. 남들의 생각과 전략을 인지하고 공정한 중재자로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때까지 인내했다. 위기가 닥칠 때도 침착했으며 냉정을 유지했다.

 메르켈은 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정치인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강하게 부각해 선거 승리와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카리스마 넘치고 포퓰리즘적인 성향을 보이는 많은 다른 정치인들과는 궤도 자체가 달랐다. 16년 동안 그야말로 종복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고집과 입장, 유머, 의견을 철저하게 억눌렀다. 이런 유연함은 극단적인 세력을 제외하고는 어떤 정당과도 손잡을 수 있는 협치를 가능하게 해 줬다. 적절한 환경을 조성한 뒤 타협으로 이끄는 데 고수였다.

2015년 이라크 바그다드의 시위대가 당시 메르켈 독일 총리의 사진이 인쇄된 깃발과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 AP=연합뉴스

2015년 이라크 바그다드의 시위대가 당시 메르켈 독일 총리의 사진이 인쇄된 깃발과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 AP=연합뉴스

 베를린에서는 탈진할 때까지 협상에 협상이 거듭됐다. 러시아나 터키에서처럼 지도자의 고압적인 나르시시즘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미국과 중국 같은 지정학적 패권 추구도 없었다. 모험이 아닌 연대, 걸출함이 아닌 타협 능력, 큰 성공이 아닌 투명한 정보를 지향했다.

 메르켈은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도, 확고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일상적인 정치 문제에서 되도록 간신히 버티다가 위기의 순간에만 결단력을 보이는, 역설적이게도 21세기 가장 현대적인 정치인이었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것이 특별한 사람’이었다. 한국은 물론 독일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매우 희귀한 종류의 정치인이 아닐 수 없다.

 전후 독일 부흥의 초석을 놓은 콘라트 아데나워나 통일 총리 콜, 동방정책의 빌리 브란트, 어젠다2010으로 유명한 게르하르트 슈뢰더에 비해 메르켈은 딱히 내세울 업적이 없다. 특별히 빛나거나 화려하지도 않다.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도, 갑작스러운 공포도 주지 않는다. 그저 루틴에 따라 모든 일을 소리 없이 처리해 나간다. 독단적인 거창한 개혁프로젝트는 보이지 않았으며 국가의 현 상황에 대한 감동적인 연설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관리만 할 뿐 통치를 하지 않는다. 전술은 알지만 전략은 모른다. 확고하게 지지하는 것은 없고 상상력 없이 실용적으로만 통치한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라고 하는 것들도 상황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철회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주로 메르켈이 속했던 기민련 내에서 나온 평이다. 자기 진영을 일사불란하게 끌고 갈 수 없었던 한 가지 이유이자, 총리의 성공이 항상 유보적인 평가를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2015년 독일 엘마우성에서 G7 정상회담이 열렸을 당시 메르켈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2015년 독일 엘마우성에서 G7 정상회담이 열렸을 당시 메르켈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메르켈은 똑똑하고 독립적이지만 격정이 없었다. 공명심이 별로 없고 자연스러운 권위가 몸에 밴 사람은 메르켈처럼 은밀하게 통치한다. 대외 정책에서는 이런 식의 믿을 만한 조정자 스타일이 문제 될 게 없었다. 메르켈은 독일 국내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밀월 관계를 대외정책에서는 만끽했다. 이 영역에서는 환상적이고, 대담하고 지적이고 기발한 계획이 차고 넘쳤다. 이렇게 넘치는 아이디어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을 끈기 있게 가려 내고, 감당할 만한 타협책을 함께 찾아 나가는 것이 메르켈 정치의 핵심이었다. 그가 독일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경탄 받고 존경받았던 이유다.

 메르켈은 허세나 과장된 약속과 구분되는 공적 겸손이라는 ‘빈곤의 미학’을 키웠다. 어쩌면 주변 국가들의 견제와 시샘을 받는 독일의 총리로서는 매우 적합한 인물이지 않았을까. 메르켈의 가장 큰 업적은 자신감 넘치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독일의 길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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