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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내가 한 주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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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어릴 적 보았던 소년 김군이 어머니랑 함께 미국에 가서 크고 배우고 자라서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고 이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주례를 해주면 좋겠다는 신랑의 청탁을 어머니로부터 전해듣고 나는 뜻밖에 주례를 하게 됐다.

그런데 신랑의 어머니는 신부가 미국에서 자란 중국 아가씨여서 영어로 주례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알고 있는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요즈음도 매일 10분씩 전화로 영어회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주례를 겁내 하지 않았다.

먼저 한국어로 주례사를 쓰고 영어로 번역을 맡겼다. 그런데 막상 번역된 영문 주례사를 받고 보니, 말로 하던 영어와 글로 쓰는 영어는 달랐다. 영어 주례사에는 평생 한번도 보지 못한 영어 단어가 참으로 많았다. 나는 당장 영어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처럼 영어사전에서 단어를 찾아가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도 영어 주례사는 어려웠다. 의미 전달을 하는 여유로운 주례사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다만 틀리지 않게 잘 읽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중국인 신부, 한복 입고 결혼식
미국서 성장 커플에 영어 주례
“서로 감싸줘야 높은 인격자 돼”

결혼식장은 신랑의 집, 경기도 이천시 한적한 마을이었다. 미국에 살던 어머니가 한국에 돌아와 살기 위해 새집을 마련했다. 숲이 우거진 넓은 정원에 식장은 꽃장식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신랑 신부가 걸어 들어올 길은 꽃잎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진심과 진정으로 새 출발 하는 신혼부부를 축하하기 위해 먼 길 찾아온 하객은 70여명이었다.

화창한 5월의 봄날, 하객들의 축복 속에 5월처럼 싱그러운 신랑 신부가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다정히 손잡고 꽃길을 걸어들어와 내 앞에 섰다.

새빨간 다홍치마에 가슴과 등판에 예쁘게 수놓은 새하얀 당의를 입은 신부는 검은 머리를 땋아 쪽을 지은 낭자에 큼지막한 비녀를 꽂고 머리 위엔 작은 족두리를 썼다. 곱고 아리따웠다. 옥색 한복을 입은 신랑은 준수해 보였다.

나는 신랑 신부에게 결혼을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건네고, 하객을 위해 먼저 우리말 주례사를 하겠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주례사를 했다.

“이 사람이 나의 배우자가 된다면, 내 인생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가는 사람을 골라 신랑은 신부를, 신부는 신랑을 자신의 배필로 정하고 오늘 백년가약의 혼례를 올리는 두 사람, 부디 한평생 행복하기를 심축드립니다. 이 세상 많고 많은 남녀 가운데 신랑 신부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으로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꼭 만나야 되는 필연의 약속이 있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상생의 기운이 뻗쳐서, 너무 좋아서 만난 상생선연(相生善緣)일 것입니다. 상생선연은 서로가 있어서 좋은 관계입니다. 두 사람은 보기만 해도 좋고 안 보면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지금 두 사람은 서로 두터운 믿음을 갖고 서로 의지하고 싶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식어갈 수도 있고, 또 떨어져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좋게만 보였지만, 막상 한 집에서 함께 오래 살다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결점도 발견하게 되고, 그 결점 때문에 상대방이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지혜로운 결혼생활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결점을 내가 이해하는 배려, 내가 감싸주고 보태주어야만 더욱 완성도 높은 인격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 힘으로 오늘의 자기가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가르쳐서 오늘의 인격과 능력을 배양해주신 부모님이 계십니다. 일천정성을 쏟아주셨던 그 부모님께 반드시 효도를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함으로써 다 각각 새 부모님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신부에게는 시부모님, 신랑에게는 장인 장모님이 생겼습니다. 그 새 부모님에게 항상 마음 쓰고 잘 모셔드린다면 신랑은 신부를 고맙게 여기고, 신부는 자기 부모님께 잘 해 드리는 신랑을 고마워할 것입니다. 이 고마운 마음이 서로에게 넘쳐나면 그것이 가정의 화목입니다. 부디 그렇게 화목하십시오. 두 사람은 우리 사회의 따뜻한 이웃이 되고,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자녀들로부터 자랑스러운 어버이가 되라고 당부합니다. 한평생 부디 행복하십시오.”

우리말 주례사를 마친 나는 신랑 신부를 바라보며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영어 주례사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나의 주례사가 끝나자 신랑 신부는 내가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으로 감사 인사를 했고, 나는 두 사람이 한평생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비는 마음을 건넸다.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