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콜럼버스의 달걀과 창의성 계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탁, 탁, 탁….’ 1980년대 초 명동 뒷골목 허름한 순두부찌개 집. 자리를 잡기 무섭게 종업원이 달려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날달걀을 손님 수만큼 식탁 위에 ‘세워’놓고 돌아선다. ‘콜럼버스의 달걀’이 발상 전환의 ‘상징’을 넘어 ‘실제’로 활용되는 것을 목도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다. 워낙 바삐 움직여야 하는 그분 처지에서 나름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것일 터, 그것을 굳이 불손하다고 여겨 기분 상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별로 깨끗해 보이지 않는 식탁 위에 밑동이 깨진 채 흰자를 흘리고 있는 그 달걀을 입에 넣는 것이 못내 꺼림칙해 찌개만 몇 술 뜨고는 자리를 떴다.

창의적 사고의 토대가 되는 지식
합리성과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목표 지향적 태도는 지양해야

지난주 화요일, 중앙일보에 실린 ‘김세직의 이코노믹스’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이다. ‘1년 내내 뜨거운 불(火) 나라에 얼음을 화폐로 도입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으라’는 도전 과제와 ‘달걀을 세로로 세우는 것’ 공히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는 과제라서 그랬나 보다. 여담이지만, 물리리만큼 유명한 이 ‘달걀 세우기’의 원조는 사실 콜럼버스가 아니라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이탈리아의 조각가·건축가이자 최초의 근대적 공학자인 필리포 브루넬레스코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1차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귀국한 날이 1493년 3월 15일이니 그가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보인 이 ‘창의적 시위’는 아무리 빨라도 1493년 여름에나 있었을 법한 일이다. 반면 브루넬레스코가 피렌체 시의회에서 자신이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건축할 적임자임을 웅변하며 이를 실연(實演)한 날은 그보다 무려 75년이나 앞선 1418년 8월 19일. 그러니 이 달걀의 주인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브루넬레스코라야 마땅하지 않나 싶다.

그날 브루넬레스코와 경쟁하던 건축가들과 콜럼버스와 함께 있던 스페인 귀족들은 순진하게 ‘달걀을 깨뜨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암묵적 약속을 지킨 대가로 ‘한 방’ 맞았다. “아니, 이 쉬운 것을 왜 몰랐지?”라는 자괴감이 아니라 반칙으로 결승 골을 내줬는데 심판이 외면하니 분통이 터질 일이다. 여기서 고개를 드는 몇 가지 의문. 암묵적 약속을 지킨 것이 틀에 박혀 머리가 굳은 ‘꼰대’로 박제되어 500년이 지나도록 조롱당할 일인가? 달걀을 깨지 말라는 ‘명시적’ 약속이 없음을 간파한 것은 발상의 전환인가 영악함인가? 자신이 이미 편법(?)으로 해결한 과제를 모른 척 제시했으니, 더욱이 그 누구도 암묵적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터이니 그 두 사람을 창의적이라고 해야 하나 교활하다고 해야 하나? 콜럼버스의 달걀에 괜스레 시비를 거는 것은 그것이 지닌 지나친 ‘목표 지향적 속성’, 즉 방법과 결과의 ‘합리성과 도덕성’에 대한 의구심, 좀 과격하게 말해 우리 모두 공유하는 ‘암묵적 약속’을 저버린 데 대한 실망감 때문이다.

반면, 김세직 교수가 제시한 과제에 대한 학생들의 아이디어는 참으로 기발하다. ‘얼음 화폐를 아이스박스에 넣어 다니자’, ‘녹지 않는 얼음을 개발하자’, ‘얼음을 불투명한 용기에 넣어 녹아도 분간하지 못하게 하자’, ‘화폐를 얼음이라고 부르자’…. 퀴즈를 보면 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신문을 든 채 머리를 굴려 본다. 우선  ‘불나라’에 ‘얼음 화폐’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부터 살펴보자. 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방안을 찾는 순수한 훈련 과정이니 그냥 넘어가도 되겠다. 이제 무엇이 상수인지 결정해 보자. 불나라와 얼음화폐 둘 다, 또는 둘 중 어느 것을 상수로 할까? 아예 상수 없이 생각해 볼까? 상수가 무엇이냐에 따라 생각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한다. 학생들이 제시한 아이디어의 공통점은 불나라의 뜨거운 날씨를 상수로 한다. 아마도 화폐 관련 강의 수강생들이었나 보다. 그 강의와 무관한 나는 얼음을 상수로 두고 뜨거운 불나라를 시원한 나라로 개선할 방안을 찾아봐야겠다.

교육의 패러다임이 주입이 아니라 창의적 사고로 바뀌어야 함은 분명하다. 콜럼버스의 업적은 그의 지리·천문·역사적 지식과 도전정신을, 브루넬레스코의 업적은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거대한 돔을 설계한 공학적 지식과 예술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다. 설마 엄청난 이권이 달린 대항해와 수백 년에 걸쳐 짓는 대성당 돔 설계를 달걀 하나 믿고 맡겼겠는가? 식물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광합성을 하듯, 새로운 생각(창의)은 풍부한 자양분(지식)과 그것을 가공하는 능력(해석·추리 등)을 토대로 한다. 유클리드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배움에는 왕도(王道)가 없다”라고 했다는데 창의성 계발이라고 해서 왕도가 있으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