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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깜깜이’ 부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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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최현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현주 금융팀 기자

최현주 금융팀 기자

빚의 역사는 인류 역사와 같다. BC 2400년 메소포타미아에선 수메르인이 부채 탕감 법령을 만들었다. 이전의 모든 채무 관계를 무효로 한다는 내용이다.

구약성서에도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禧年)에 부채를 탕감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BC 594년 아테네에선 집정관인 솔론이 이례적인 부채 탕감 법령을 발표했다. ‘솔론의 개혁’이다.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은 자유인이 되었고, 빚 때문에 저당 잡힌 땅이나 재산도 본래 주인에게 돌려줬다.

이 과정에서 재화를 빌려준 채권자는 재산상 손해를 입게 된다. 그런데도 솔론의 개혁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데는 손해를 본 채권자에 대한 당근이 있어서다. 당시 아테네 시민은 소유한 재산에 따라서 계급이 나누어졌는데, 계급에 따라 참정권을 줬다. 솔론의 개혁으로 손해를 본 채권자들은 대신 정치적 권리를 얻었다.

5000여 년 전부터 부채 탕감 제도가 있었던 이유는 공존 때문이다. 빚 때문에 노예가 되는 수요가 늘면 세금을 걷을 대상이 줄고 병력을 충당하기도 어렵다.

윤석열 정부의 빚 탕감 정책이 연일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2020년 4월부터 시행된 자영업자·중소기업(코로나19 피해)의 대출 만기 연장과 이자 상환 유예는 지난달 말 다시 연장됐고, 새 출발 기금(30조원)으로 최대 90%까지 원금을 감면한다.

빚을 내 주식·가상화폐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청년을 위한 원금 상환 3년 유예, 이자 최대 50% 감면 제도도 시행 중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연일 거세지고 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세금을 써가며 책임지지 못할 빚을 진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비단 그것만 문제는 아니다. 부채 탕감 정책이 ‘깜깜이’ 부실을 키울 수 있다. 지난 7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태양광 관련 대출·펀드 전수조사 결과만 봐도 그렇다. 결과는 “아직 부실 발견 못 함”이다. 부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애매한 결과다. 그런데 그럴 만도 하다. 부실의 판단 조건은 연체다.

그런데 원금은커녕 이자까지 받지 않는 상황에서 부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2018년부터 시행된 태양광 관련 대출의 만기(최저 5년)도 내년부터다. 결국 전수조사는 의미가 없었다. ‘정치 금융’ 비난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지금 필요한 건 공존을 위한 금융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