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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간 1만명 웰다잉 지킴이…“모든 의료인, 호스피스 교육 받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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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호 18면

오늘 호스피스의 날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의 완화의료팀장을 맡고 있는 박명희 간호사. [사진 박명희]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의 완화의료팀장을 맡고 있는 박명희 간호사. [사진 박명희]

“멜론 아이스크림을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나요….”

박명희(52) 간호사는 6년 전 봄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4살 민영이(가명·여)와 처음 만났다. 산소마스크를 쓴 아이는 “블루베리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 멜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는 2014년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2년을 투병했지만, 상태는 더 나빠졌다. 딸의 고통을 더 보기 힘들었던 부모는 항암 치료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민영이는 호스피스 병동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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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가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떠나면 동생은 누가 돌볼까요?” 호스피스를 알진 못했지만, 민영이는 죽음이 임박한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박 간호사는 민영이가 죽음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이가 겁먹지 않게 노란색 청진기를 준비했고 진료 때마다 산타처럼 선물을 건넸다. 주사를 놓아야 할 때면 “병원 놀이를 하자”며 안심시켰다.

부모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담과 음악·미술 요법 등을 통해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이해하고 딸과의 이별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왔다. 노력 덕분이었을까. ‘항암 치료를 멈추면 한 달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이란 진단과 달리 민영이는 4개월 가까이 삶을 이어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6년 8월 어느 날 저녁. 민영이는 의료진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 간호사는 “호스피스 병동엔 소아·청소년 환자가 적어 기억이 선명하다”고 회고했다.

박 간호사는 32년간 병상을 지킨 베테랑이다. 건축가를 꿈꾸다 우연히 선택한 간호사 일은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다. 오래도록 암 환자 병동을 지킬것 같았던 그의 삶은 1996년 호스피스 완화치료 병동 근무를 자원하면서 달라졌다.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와 그의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뜻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매일 죽음을 앞둔 환자를 만나 ‘잘 죽을 수 있게’ 도와야 했다. 국내에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널리 도입되기 전이었다. 인력이 부족했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환자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호스피스를 택한 것 아니냐’는 부정적 시선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신참 간호사 때의 마음가짐으로 하나씩 부딪혀 익히다 보니 조금씩 눈이 뜨였다. 환자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대를 넓히니 라포(rapport, 친밀감과 신뢰 관계)가 형성됐다. 환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의사·의료사회복지사·자원봉사자로 이뤄진 호스피스 다학제 팀도 조금씩 단단해졌다.

지난달 박 간호사는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팀장이 됐다. 20여년간 호스피스 병동에서 그의 손을 거쳐 간 환자는 어느덧 1만명을 넘어섰다. 그 사이 10개였던 병상은 23개로 늘었고 자원봉사자를 포함해 30여명이던 인력도 75명이 됐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엔 매년 700여명의 환자가 입원한다. 대기자가 수십 명이다 보니 입원 연락을 할 때쯤엔 환자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경우도 많다.

그는 모든 의료인이 호스피스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팀이 임종을 앞둔 모든 환자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의료시스템 안에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인생엔 생로병사가 있어요. 생명의 시작엔 기꺼이 함께하며 기쁨을 나누지만, 마지막 순간의 슬픔엔 함께하길 꺼리죠. 죽음이 두렵고 멀리하고 싶은 존재지만 피할 수 없잖아요. 나와 주위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미리 죽음과 가까이 있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달란트를 나눴으면 해요.” 8일 10번째 호스피스의 날을 맞은 ‘웰다잉 지킴이’의 간절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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