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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한산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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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호 31면

황건강 경제산업 부문 기자

황건강 경제산업 부문 기자

주요국 가운데 유일한 마이너스 금리 국가. 일본의 고집스러운 금리 동결 배경엔 ‘세 개의 화살’이 있다. 일본 전국시대에 아키(현재 히로시마현 서부 지역)의 다이묘였던 모리 모토나리는 자신의 세 아들에게 화살 하나씩을 나눠 주고 꺾게 한 뒤, 재차 화살 세 개를 한꺼번에 주고 꺾어 보게 하면서 세 명이 합심하면 당할 자가 없을 것이란 교훈을 전한다. 세 아들은 이 교훈을 잊지 않았고, 모리 가문은 서일본을 재패한 유력 가문으로 부상했다.

이 얘기는 2012년 ‘아베노믹스’에 차용됐다. 아베노믹스의 세 가지 정책적 목표(통화 완화 정책, 재정지출, 구조개혁)를 묶어 ‘세 개의 화살’로 이름 붙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일본인들에겐 세 가지 정책적 목표는 함께 진행돼야 한다는 인식을 지우기 어렵다. 더구나 아베노믹스는 20년간 지속된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 행진 속에서 니케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다. 달러당 엔화값이 140엔대를 돌파했지만, 환율을 잡겠다고 제로금리를 포기하지 못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는 셈이다.

도쿄에 있는 일본은행 본점. [로이터=연합뉴스]

도쿄에 있는 일본은행 본점. [로이터=연합뉴스]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는 역사와 문화, 관습 등에서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했던가. 주요국들이 앞다퉈 국민들에게 공통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국익 챙기기에 혈안이 된 시대다. 최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로 점철된 미국의 행보도 마찬가지다. 이민자들의 나라로 출발해 인종 간 화합을 강조하는 한편에는 미국 우선주의가 애국으로 여겨지는 ‘공동체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 반도체진흥법안에 ‘미국을 위한 반도체 법안(CHIPS for America)’이라 이름 붙이고 미국 의회에서 일사천리로 통과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라 처치웰 런던대 교수는 지난 9월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미국 우선주의는 역설적으로 미국 정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코드 중 하나”라며 “미국 우선주의는 1850년대 가톨릭 이민자들의 위협으로부터 개신교 문화를 방어하기 위한 정당(Native American Party)이 결성됐을 때부터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거세게 몰아치는 미국 우선주의 바람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도널드 트럼프와 ‘미국 우선주의’를 선거문구로 내세운 우드로 윌슨 등 전직 대통령 몇몇의 고집이 아니란 얘기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러시아는 더 노골적인 사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크렘린 홈페이지를 통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하나의 민족”이라고 밝힌 바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모두 9~13세기 존재했던 키예프공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기억을 소환해 내고자 한 것이다. 원래 하나의 민족이었던 지역을 수복하는 것이기에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쟁이 아닌 ‘특별 군사 작전’으로 지칭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러시아 여론조사센터(VCIOM)의 조사에서 러시아 국민의 71%는 ‘특별 군사 작전’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추진력은 강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K-반도체 벨트’를 구축하겠다던 야당은 정권이 바뀌자 ‘K칩스법’을 외면하고 있다. 역사적 기억을 소환하기 어려운 알파벳으로 이름 붙인 탓일까. 이참에 K칩스법을 ‘한국반도체 산업법’, 줄여서 ‘한산법’이라고 명명하는 건 어떨까. 외세로부터 한반도를 지킨 한산대첩이 떠올라 한국 반도체 산업을 지키는 데 추진력이 붙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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