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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AI보다 못한 여야의 정치감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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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도발은 종래의 패턴과는 확연히 다르다. 북한은 한·미 연합훈련을 앞두고 온갖 험악한 말과 함께 무력 시위를 하다가도 정작 훈련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잠잠해지곤 했다. 연합훈련을 위해 한반도에 배치된 미군의 전략자산이 갑자기 공격용으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 근저에 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은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이제 더는 국가안보회의(NSC) 소집하느라 새벽잠을 설치지 않게 하겠다”고 지키지 못할 말을 했지만, 그네들에게 한·미 훈련은 잠을 설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잠들지 못하게 하는 공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군 전략자산의 종합 세트인 항공모함 편대가 와서 훈련을 펼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일을 뻥뻥 쏘아올렸다. “핵보유국을 감히 건드리겠냐”는 위세다. 모르긴 해도 한·미 국방 당국은 이 초유의 상황에 대한 평가와 대응에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일단의 전문가 사이에서 “이제는 종래의 억지 전략으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과 전술핵탄두 역량을 보여줄 7차 핵실험이 기다리고 있다. ‘게임체인저’ 획득의 종착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대한민국이 마주한 상황은 이토록 엄중하다. 국군의날 행사에서 ‘괴물 미사일’을 공개한 건 이런 움직임을 겨냥한 사전 경고였을 것이다. 과연 이런 경고가 대담해질 대로 대담해진 북한에 통할지는 미지수다. 확장 억제의 가동은 필수 대비 사항 중 하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억지가 될지는 더 세밀히 따져봐야 한다. 핵공유나 핵균형론 등 모든 가능한 옵션을 올려놓고 대응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만 하기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참모진엔 하루 24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북한 도발과 경제난의 복합 위기
대통령에겐 정쟁 빠질 시간 없어
진흙탕 싸움은 지는 게 이기는 길

한쪽 방향에서만 오는 위기는 준비만 잘하면 막아낼 수 있다. 진짜 위기는 전방위적 복합위기다. 우리는 이미 미증유의 퍼펙트 스톰 영향권에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과거에는 거대한 중국 시장을 옆에 둔 덕에 두어 차례의 경제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는 모범생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중국 자체가 위기의 진원지 중 하나다. 경제위기 대응에만 전념해도 대통령과 참모들에겐 시간이 부족할 판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단언컨대 우리에겐 ‘날리면이냐, 바이든이냐’로 날을 지새울  여유가 없다. 평소 필자는 취재원과의 장시간 인터뷰 녹음을 인공지능(AI) 음성인식 프로그램으로 푼다. AI가 만들어주는 텍스트파일을 별로 수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식 수준이 높아졌다. 혹시나 해서 논란이 된 윤 대통령의 뉴욕 발언을 입력해 보니 판독 불가 판정이 나왔다. 어지간해서는 결과물을 척척 내놓는 AI가 녹음된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두 손 든 것이다. 음향 전문가들이 보다 정밀한 프로그램을 돌린 결과도 대부분이 그랬다고 한다. 요컨대 MBC가 의도적인 자막 조작으로 동맹을 훼손했다고 수사 당국에 고발하고 과학적인 분석을 의뢰한들 딱 부러진 결론을 내기 어렵다는 얘기다. 어쩌면 AI 알고리즘이 온갖 뉴스와 댓글 등을 통해 정치적 리스크를 학습한 끝에 판독을 거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생결단의 싸움을 펼치는 여야보다 차라리 답이 없다는 AI가 더 현명한 것 아닌가.

대통령은 이 지루한 소모전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한다. 뭐 그렇게 담대한 결단까지 요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사실대로 말하고 부주의한 부분이 있었으면 있었다고 인정한 뒤 이렇게 선언하면 된다. “이 순간부터 불필요한 정쟁을 멈추고 국가 대사에 전념하겠습니다.” 야당도 막무가내식 발목잡기는 그만둬야 한다. 협치란 단어가 사전에 없는 여야의 싸움은 계속되겠지만, 싸울 거리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싸울 가치가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이 진흙탕 싸움은 먼저 지는 사람이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