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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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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지난해 개천절 당일 인천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에서 열린 ‘제4354주년 개천대제 봉행’ 모습. 비속어 다툼에 휩싸인 정치권에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말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일까. [사진 강화군]

지난해 개천절 당일 인천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에서 열린 ‘제4354주년 개천대제 봉행’ 모습. 비속어 다툼에 휩싸인 정치권에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말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일까. [사진 강화군]

개천절 아침이다. 4355년 전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린 날이다. 이육사 시인은 ‘어디 닭 우는 소리가 들렸으랴.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고 목놓았지만 2022년 오늘엔 개와 고양이, 개와 원숭이가 먹잇감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뜻, 즉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홍익인간·弘益人間) 이치대로 나라를 다스리라는(재세이화·在世理化) 가르침이 가을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 같다.

가을 정국 빨아들인 비속어 논란
먼저 멈추는 쪽이 이기지 않을까
우리 ‘××들’ 입에 밥부터 넣어야

 지리산 시인 이원규가 지난주 페이스북에 최승자 시인의 ‘개 같은 가을이 왔다’를 인용했다. 최 시인은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이라고 했다. 독설의 수위가 높다. 청명한 가을을 개와 매독에 비유했다. 얼마나 절망이 깊었을까 싶다. 이 시인은 한술 거든다. “말로만 국민, 국민 하면서도 사실은 ‘이 ××들’ ‘저 ××들’이다. 야당 국회의원이 ’이 ××들‘이면 그보다 못한 우리 백성들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지금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비속어 ‘××’ 논란이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다. 4일 시작하는 윤석열 정부 첫 국정감사에서도 여야는 격돌을 예고하고 있다. ‘××’의 대상이 미국(바이든)인지, 국회(야당)인지 사생결단도 불사할 태세다.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꼴이다. 한 번 기세가 밀리면 좀체 회복하기 어려운 게 정치라지만 그래도 정도 나름이다. 국민과 협치를 입에 달고 사는 여의도의 자기 배 채우기만 드러날 뿐이다.
 ‘××’ 시비를 보며 2013년 가을이 기억났다. 9년 전 황병승 시인이 미당문학상을 받았는데, 미당 서정주의 고향인 전북 고창 질마재에서 수상작 ‘내일은 프로’가 낭송됐다. 제법 긴 산문시 중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지요/ “나쁜 ×× 같으니라고!”/ 나쁜 ××는 나뿐인 ××, 나밖에 모르는 ××, 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낭송자가 ‘나쁜 ××’에 힘주어 말하는 대목에서 먹먹한 슬픔이 묻어났다.
 시 속 화자가 ‘나쁜 ××’가 된 사연이 우스꽝스럽다. 남자가 사흘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여자는 침울하기만 하다. ‘서로를 철사로 꽁꽁 묶고’ ‘서로에게 석고를 들이부으며’ 약속한 사이건만 남자는 여자의 작은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한 것이다. 왜? 남자는 여자가 좋아하는 살구를 한 번도 사다준 적이 없고, 살구 대신 복숭아를 사왔기 때문이다. 여자가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데도 말이다. 여자는 결국 집을 나가버린다. “어째서,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살구가 당신의 마음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을까”라고 한탄하면서….
 ‘나뿐’만 챙기다가 ‘나쁜’ 남자가 된 연유가 꽤 상징적이다. 지금 국회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민생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북한 미사일은 연일 하늘을 가르는데 ‘××’의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너 죽고 나 죽자’로 싸우는 모습이 상상 초월 ‘울트라 부조리극’ 자체다. 오지도 않을 해결사 ‘고도’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윤 대통령과 여당의 처신이 못내 아쉽지만 “때는 기회다”며 긁어 부스럼을 만든 야당도 볼썽사납긴 도긴개긴이다. 그사이 애먼 국민만 가리산, 지리산 하다가 길을 잃게 됐다.
 영화 ‘친구’의 유명한 대사처럼 그만하면 많이 묵었다. ‘××’ 다툼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이제 먼저 칼을 거두는 쪽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때로는 지는 게 이길 수도 있지 않은가. 싸움을 더 끌수록 “(국회의원) 심장 옆에 심통이란 게 있어, 그 뒤에 욕심통이 있는데”(영화 ‘정직한 후보2’)만 각인시킬 뿐이다. 같은 ‘××’에도 맛있는 ‘××’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게  ‘××’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라 했다. 단군 이래 가장 힘들다는 우리 ‘××들’을 살피기에도 하루하루가 화급한 요즘이다. 복숭아 대신 살구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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