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4초 발언'과 '13시간의 공백'

중앙일보

입력 2022.09.29 01:10

업데이트 2022.09.29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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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요 며칠 지겹게 윤석열 대통령의 '바이든' vs '날리면'을 들었다. 김은혜 홍보수석이 국민을 향해 "다시 한번 들어봐 달라"고 하니 말이다. 근데 청력이 떨어진 때문인지 분간이 잘 안 된다. 윤 대통령은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며 정면승부를 택했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지난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쉐라톤 뉴욕 타임스퀘어호텔 내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지난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쉐라톤 뉴욕 타임스퀘어호텔 내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훈현 9단은 "바둑은 '묘수(妙手)를 잘 두기보다 악수(惡手)를 두지 말아야 한다. 다만 현실에선 악수인 걸 알면서도 두어야 할 때가 있다. 바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윤 대통령의 강공이 진실, 신념 어느 쪽에 입각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형태로건 이번 순방의 복기는 필요하다. 아파도 제대로 파헤쳐야 남은 임기 4년7개월, 정권도 국민도 편해지기 때문이다.

#1 대통령실 주장이 맞다 해도 핵심 의문은 남는다. 김 수석의 해명은 "사적 발언이었다"→"'(한국)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이 맞다"로 변했다. 그 간격은 무려 13시간.

불과 4초짜리 발언 하나를 두고 '바이든'과 '이 XX들'이 기정사실화할 때까지 대통령실은 뭐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 질문에 홍보라인은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13시간 후 해명한 게 아니라, (잘못된 보도로) 아까운 순방 13시간을 허비했다"고 한다.

착각해선 곤란하다. 그런 걸 제대로 대처하라고 대통령실이 있고, 국민 세금으로 월급을 주고 있는 게다.

 MBC의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보도 영상. 사진 MBC 캡처

MBC의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보도 영상. 사진 MBC 캡처

소식통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본인이 당시 어떤 어휘를 써서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을 되살리지 못해 '혼돈의 새벽'(현지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출석한 회의장이라 대통령실의 자체 녹화본도 없었다 한다. 결국 밤새워 듣고 또 듣고, 당시 상황에서 바이든이나 미 의회를 조롱할 리 없다는 최종 판단 아래 '날리면'으로 결론내렸다.

외부 분석 결과는 캐나다로 이동해서야 얻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다.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다. 우연까지 겹쳤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국내 언론, 야당, 외신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논란을 13시간이나 질질 끄는 사이 CNN·AFP·블룸버그 등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다 퍼지고, 그렇게 각인되고 말았다.

대통령실 말대로 '동맹을 훼손해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보도였다면 조기 차단에 실패한 것 자체가 치명적 실수다.

대통령이 망설일 때, 헷갈려 할 때 "더 이상 기다려선 안 된다"며 결단을 촉구하는 참모가 없었단 얘기다. 그래서 꽃길만 걸어 온 홍보 아마추어가 아닌 리스크 관리의 '찐 프로'들이 필요한 것이다.

'48초 만남'보다 '13시간의 공백'은 더 아찔하다.

#2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일본의 기시다 총리 또한 유엔총회 기간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을 추진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글로벌펀드 행사장에서 잠시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데 그쳤다. 길어 봐야 1분. 그러나 일본에선 언론도, 야당도, 어느 누구도 '외교참사'라고 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애초부터 가변성이 큰 일정을 고려해 일본 정부가 그 어떤 사전 공식 발표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합의해 놓았다"고 큰소리친 우리 국가안보실과의 판단력 차이가 이런 판이한 결과를 초래했다.

48초 눈도장 인사보단 차라리 구글·오라클 등 미 주요 테크 기업 임원들과 한국의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행사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편이 나았다.

다만 한·일 약식회담은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야당과 언론에선 굴욕 외교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뒤치다꺼리를 떠넘긴 주인공은 문재인 정부다. 윤 대통령 입장에선 욕을 안 먹으려면 적당히 문 정부처럼 반일(反日)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 총회장 인근 한 콘퍼런스 빌딩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 총회장 인근 한 콘퍼런스 빌딩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하지만 2015년 위안부 합의 때도 그랬듯, 욕을 먹더라도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일종의 사명이다.

그런 점에서 내키지 않지만 자신의 참모가 재를 뿌려 분위기를 망쳐놨어도, 기시다가 있는 건물로 손수 찾아간 윤 대통령의 결단은 오히려 높이 평가받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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