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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가정에 1000달러씩 주자” 국제 원조 반기 든 前 장관

중앙일보

입력

로리 스튜어트 전 영국 국제개발부 장관. 외교 전문가인 그는 비영리기구 '기브 디렉틀리' 이사장을 맡아 빈곤국가 현금기부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페이스북]

로리 스튜어트 전 영국 국제개발부 장관. 외교 전문가인 그는 비영리기구 '기브 디렉틀리' 이사장을 맡아 빈곤국가 현금기부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페이스북]

 “빈곤 지역의 모든 가정에 현금 1000달러(약 135만원)를 주면 그들의 삶은 훨씬 더 좋아진다.”

영국에서 4개 부처 장관을 지낸 로리 스튜어트(49)의 주장은 단순하지만 급진적이다. 영국 보수당 대표 후보이기도 했던 스튜어트는 최근 미국의 비영리기구(NGO) ‘기브 디렉틀리’(Give Directly) 이사장을 맡았다. 텔레그래프는 19일(현지시간) “그의 말에는 조용한 혁명이 있다”며 그를 소개했다.

“스스로 결정하도록 맡겨야”

“우리는 빈곤층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텐트를 지급하고, 그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사기 위해 텐트를 내다 팔도록 하지 않아요. 우리는 실제로 그 사람들이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하도록 맡기죠.” 스튜어트는 가뭄에 시달리는 케냐 남부의 킬리피에서텔레그래프 기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그가 빈곤층에 현금으로 지급하자고 주장하는 ‘1000달러’는 유엔(UN) 직원들의 약 4일 치 급여와 비슷하다.

스튜어트는 “현금에는 마법의 승수 효과가 있다”며 “현금이 경제 전반을 발전시킨다”고 주장했다. “현금 기부는 사람들이 집 수리에 필요한 지붕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소를 사서 칼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일 수 있게 한다. 또 (그 돈으로) 작은 사업체를 차리거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다. 식단이 좋아지고 병치레를 하는 날도 줄어든다”면서다.

로리 스튜어트 전 영국 국제개발부 장관.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 찰스 왕이 주도했던 '터콰이즈 마운틴' 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외교, 구호 전문가다. [사진 페이스북]

로리 스튜어트 전 영국 국제개발부 장관.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 찰스 왕이 주도했던 '터콰이즈 마운틴' 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외교, 구호 전문가다. [사진 페이스북]

그는 1960년대부터 유엔과 NGO 등 기관을 중심으로 수조 달러 이상 쏟아부은 국제 원조에 대해선 “‘모범 사례’나 ‘역량 강화’ 같은 멋진 표현으로 포장한다”며 “이런 표현은 그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을 전제로, 우리가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원조가 실패하면 그들의 ‘의지 부족’과 ‘게으름’을 탓한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공동체가 무지하고 게으르다고 암시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현금기부’ 효과에도 우려

그가 이사장을 맡은 ‘기브 디렉틀리’는 2008년 하버드 대학과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 학생 4명이 설립한 NGO로, 라이베리아와 케냐, 말라위, 르완다 등 30만 가구 이상에 현금 기부를 했다. 이에 대한 효과는 연구 결과로도 이어졌다. 샌디에이고 대학과 조지타운 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500달러 송금만으로 아동 사망률이 70% 감소하고 아동 건강 상태가 좋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프리카 주요 사례를 검토한 결과에서도 현금 지원을 통해 산전 치료와 검진이 늘어 안전한 출산으로 이어졌다.

현장에선 여전히 이런 구호 방식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현금 지원이 남성들의 마약과 술, 담배 구매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내전 등으로 불안정한 국가의 경우 현금 지원을 받은 가구에 대한 안보가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브 디렉틀리’가 접촉한 국가는 대부분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빈곤국에 대규모 투자를 할 경우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구호 요원 설득도 쉽지 않은 과제다.

이에 대해 스튜어트는 “(일자리를 지키려는) 이기심보다는 심리의 문제”라고 했다. “구호 요원들은 전문 지식과 기술이 있고, 사람들을 구하려면 자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평생을 바쳤다. 그런데 수혜자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그들보다 더 잘 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면 구호인들은 삶 자체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년간 빈곤국 도보 여행 

로리 스튜어트 전 영국 국제개발부 장관. 2020년 런던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코로나19로 선거가 연기되자 선거비용 부담을 이유로 사퇴했다. [사진 페이스북]

로리 스튜어트 전 영국 국제개발부 장관. 2020년 런던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코로나19로 선거가 연기되자 선거비용 부담을 이유로 사퇴했다. [사진 페이스북]

스튜어트는 2019년 국제개발부 장관을 지낸 외교ㆍ구호 전문가다. 홍콩에서 태어나 영국의 이튼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발리올 칼리지를 졸업했다. 옥스퍼드 재학 시절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졸업 후 인도네시아와 몬테네그로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다 일을 관두고 2년간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파키스탄, 인도, 네팔 등을 도보로 여행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2005년 카불에서 찰스 왕이 주도했던 ‘터콰이즈 마운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2008년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 카 인권정책센터 소장을 지낸 뒤 2010년 총선에 출마해 2019년까지 하원의원을 지냈다. 2015년 환경부 장관을 시작으로 외무부, 국제개발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2019년 보수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지만, 보리슨 존슨이 승리하자 내각에서 사임한 뒤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20년 무소속으로 런던시장 선거에 나섰다가 코로나19로 선거가 연기되자 선거비용 부담을 이유로 사퇴하고 학계(예일대 잭슨 국제문제연구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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