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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외모의 5조 부자…클럽 전전했던 29세 영리치의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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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마그나 위트조. 19살 때 노르웨이 최대 연어 가공업체 살마ASA의 창업자인 아버지 구스타프 위트조로부터 지분 46%를 상속받아 현재 순자산이 35억 파운드(5조5000만원)에 달한다.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구스타프 마그나 위트조. 19살 때 노르웨이 최대 연어 가공업체 살마ASA의 창업자인 아버지 구스타프 위트조로부터 지분 46%를 상속받아 현재 순자산이 35억 파운드(5조5000만원)에 달한다.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정말 터무니없이 잘 생겼다면, 아니면 정말 터무니없이 부자라면 뭘 하고 싶을까?” 영국 일간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20일(현지시간) 노르웨이 모델 구스타프 마그나 위트조(29)를 소개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미 돈과 외모 둘 다 가진 그에게는 이런 질문이 무의미해 보인다”면서다. 초호화 파티나 슈퍼카를 자랑하던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은 이제 모델 겸 투자자, 자선사업가로 달라진 모습을 선보였다.

위트조는 현재 순 자산이 35억 파운드(5조5000만원)에 달하는 슈퍼 영리치다. 19살 때 노르웨이 최대 연어 가공업체 살마ASA의 창업자인 아버지 구스타프 위트조로부터 지분 46%를 상속받았다. 아버지가 1991년 직원 11명과 배 몇 척으로 시작한 연어잡이 사업은 이제 전 세계에 직원 1500명을 거느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연어 가공 및 수출 기업이 됐다. 위트조는 “상속 후 달라진 건 없다”며 “여전히 아버지의 회사이고, 여전히 아버지가 경영 전반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2년간 새벽마다 배타고 연어 키워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가지 않고 아버지 회사에서 2년간 일했다. 주로 새벽에 배를 타고 양식장에 나가 연어를 번식시키기 위해 자극하는 업무였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됐지만, 종일 육체노동을 하는 것은 너무 좋았다”며 “이 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어가 작은 알에서 어떻게 5㎏ 성체로 성장하는지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살마ASA의 주요 주주이지만, 경영에 나설 생각은 없다.

노르웨이 모델 구스타프 마그나 위트조. 잡지 보그 스칸디나비아 화보 촬영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노르웨이 모델 구스타프 마그나 위트조. 잡지 보그 스칸디나비아 화보 촬영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위트조는 현재 모델 겸 스타트업 투자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19 직전 친구의 추천으로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돼 종종 화보 촬영을 한다. 사람들은 그가 ‘평범한’ 모델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촬영 현장에서만큼은 그의 배경이나 정체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나는 수줍음이 많지만, 모델을 할 때만큼은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 재미있다”며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많다”고 했다. 그는 ‘위스키 캐피털’ 공동 운영자로 기술 스타트업에도 투자하고 있다.

한때 철없던 시절도 있었다. 19살 때 시속 60㎞ 제한 구역에서 시속 180㎞로 운전하다가 2주간 징역을 살기도 했다. 위트조는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응당한 처벌이었다”며 “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극복해야 하고, 법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나이트클럽과 초호화 파티도 즐겼지만, 이제는 “4시간 동안 날뛰는 것보단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재미있다”고 말한다.

“교육이 가장 중요…기회 주고파”

노르웨이 최대 연어 가공업체 살마 ASA 주요 주주인 모델 구스타프 마그나 위트조.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노르웨이 최대 연어 가공업체 살마 ASA 주요 주주인 모델 구스타프 마그나 위트조.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대신 그는 다른 ‘진짜’ 재미를 찾고 있다. 일주일에 9번 운동을 하고, 세계를 여행하고, 그리고 지난해 설립한 자선 재단 ‘W 이니셔티브’ 업무를 보는 일이다. 이 재단에서 진행한 첫 번째 프로젝트가 우간다 4000명 아이에게 깨끗한 물과 위생 시설 설치 사업이었다. 그는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안전한 곳에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며 “더 많은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고 싶다”고 밝혔다. “재단 일은 평생 할 수만 있다면 함께하고 싶다”면서다.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부모님을 만나고 노르웨이의 섬 프뢰위아의 고향 친구들과도 종종 어울린다. 물론 평범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축구와 수영 등을 즐겼다는 그는 “내가 자라온 환경에 감사하다”며 “돈밖에 모르고 살았다면 달랐겠지만, 우리는 그저 평범하고 현실적인 가족이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이게 바로 내가 간직하면서 살아갈 가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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