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로 쪼그라든 일본…명목GDP 30년 만에 4조 달러 밑돌 듯

중앙일보

입력

지난 6월 24일 일본 도쿄 신주쿠에 있는 환전소. 외환시장에서 달러 당 엔화 가치가 떨어지자 환전소에 달러를 들고와 엔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사진 김현예 도쿄 특파원

지난 6월 24일 일본 도쿄 신주쿠에 있는 환전소. 외환시장에서 달러 당 엔화 가치가 떨어지자 환전소에 달러를 들고와 엔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사진 김현예 도쿄 특파원

“달러로 보는 일본이 쪼그라들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닛케이) 신문이 19일 엔저(円低) 타격에 시달리는 일본 경제를 이렇게 표현했다. 닛케이는 '1달러=140엔'으로 환산할 경우 일본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30년 만에 4조 달러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경제가 버블경제 붕괴 직후인 1992년 수준으로 되돌아갔단 뜻이다.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19일 오전 11시 기준 엔화가치는 달러당 143엔 선에서 거래 중이다. 지난 1월엔 엔화가치가 달러당 115엔 수준이었는데, 9개월 만에 엔화 가치가 약 24% 하락(환율 상승)한 것이다.

닛케이는 “19일 기준 올해 평균 엔화가치는 달러당 127엔 수준으로, 올해 남은 기간 엔화 가치가 현재 상태를 유지하거나 더 떨어지면 명목 GDP가 4조 달러를 밑돌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지난 1년간 달러·엔 환율 추이. 인베스팅닷컴 캡처

지난 1년간 달러·엔 환율 추이. 인베스팅닷컴 캡처

엔화 약세로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비중도 4% 미만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한 때 전 세계 GDP의 15%였던 적도 있었다. 닛케이는 “2012년 일본의 명목 GDP가 6조 달러를 넘으며 독일의 1.8배였는데 올해는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며 “달러 환산 GDP가 지난해보다 20% 줄어들어도 (실물 경제에선) 큰 불황은 아니지만 국가 간 비교에서는 국력이 약해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1달러=140엔'일 경우 달러로 환산한 일본의 평균임금도 1990년대 수준인 연 3만 달러로 되돌아간다. 닛케이는 “올해 달러 대비 엔화가치 하락률은 한국 원화보다 더 가팔랐다”며 “2011년 달러로 환산한 일본의 평균임금은 한국의 2배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거의 비슷해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물가 차이를 반영한 구매력평가 기준 평균임금은 이미 역전됐는데 명목 평균임금도 비슷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엔저가 이어지면 해외에서 인재를 데려올 수 없게 되고, 이는 지속적인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했다.

수출 경쟁력 강화와 일본 여행객 증가와 같은 엔저의 긍정적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일본 기업 주식을 사들이는 외국인 투자자 수요도 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외국인은 일본 기업의 주식을 2조7000억엔(26조2400억원) 순매도했다.

달러화로 평가한 일본 닛케이지수 평균은 올해 23% 하락해 2008년 세계금융위기(-42%)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반대로 엔저로 인한 수입 물가 부담은 커지고 있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의 선물 가격이 올해 13% 상승했지만, 같은 기간 엔화로 거래하는 도쿄상품거래소에선 33% 뛰었다.

일본 정부가 1990년대 이후 정책적으로 엔화가치를 낮게 유지한 것이 일본 산업의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BNP파리바증권의 고노 류타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엔저가 유지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일본 기업이 늘어나 전체 생산성이 떨어지고 임금 하락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닛케이는 “일본이 엔저나 완화적 통화정책에 의존해 버티면서 혁신을 하지 않으면 국력의 추락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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