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섭 "꼰대들 향연이지"…이순재·노주현과 꽃할배 '아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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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가 젊은 사람들 연극인데 ‘꼰대’ 버전으로 바꿔보니 나름대로 해학‧깊이가 있어요. 늙은이들이 투닥거리는 걸 귀엽게 봐줄 수 있는 것도 이 작품 특징이죠. 나이 든 사람들이 이 연극을 한 건 아마 세계에서 처음 아닌가, 합니다.”(이순재)

지난 2일 서울 대학로의 ‘아트’ 연습실. “제일 꼰대가 먼저 말씀하시라”는 일흔여덟 동생 백일섭의 넉살에 맏형 이순재(88)가 작품 설명을 도맡았다. ‘막내’ 노주현(76)은 “셋이 한 무대는 처음인데 상상하니까 재밌겠더라”며 “무대에 설 때의 희열은 드라마‧영화와는 확 다르다”고 반색했다.
평균 나이 80세, 50년 넘는 연기 경력 동안 인연을 다져온 세 배우가 우정과 예술에 관한 블랙 코미디 연극 ‘아트’로 뭉쳤다. 9월 1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공연하는 이번 연극은 최재웅‧최영준‧박정복‧박은석 등 젊은 배우팀과 별도로 꽃할배(시니어)팀 공연을 처음 마련했다.

연극 ‘아트’ 최초 시니어 캐스팅 #40년지기 된 이순재‧백일섭‧노주현 #우정과 예술에 관한 블랙 코미디 #“‘꼰대’ 버전만의 해학‧깊이있죠”

꽃할배판 '아트' 탄생 배경…"나이들어 하고픈 작품" 

연극 '아트'에 출연하는 배우 노주현, 이순재, 백일섭(왼쪽부터)을 지난 2일 대학로 티오엠 연습실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극 '아트'에 출연하는 배우 노주현, 이순재, 백일섭(왼쪽부터)을 지난 2일 대학로 티오엠 연습실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94년 파리에서 초연한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대표작으로, 한국에선 2003년부터 공연해 누적 25만명(공연 홍보사 집계)이 관람했다. 거의 백지에 가까운 현대회화를 거금을 주고 산 피부과 의사 세르주(노주현)를 고지식한 항공 엔지니어 친구 마크(이순재)가 조롱한다. 결혼을 앞둔 우유부단한 이반(백일섭)은 친구들 싸움에 쩔쩔맨다. “이딴 판때기가 5억원이냐”는 마크의 비아냥이 신호탄이 돼 친구들 사이 묵은 상처, 질투, 허영심을 폭로한다. 몰리에르 어워드,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 이브닝 스탠다드 어워드, 토니 어워드, 뉴욕 비평가 협회 등 세계 주요 연극상을 휩쓸어, 뉴욕타임스‧가디언 등이 예술에 관한 걸작 연극으로 꼽는다.
원작의 15년 우정을 40년 지기로 바꾼 시니어팀 공연은 왜 이제야 시도했나 싶을 만큼 서로 다른 예술관에 박혀있는 삶의 관록이 자연스레 묻어난다. 성종완 연출은 “지난 시즌 때 배우들과 ‘나이 들어서 하면 작품이 더 살 것 같다’고 얘기한 게 반영됐다”면서 “작품에서 이해 안 되던 친구들 사이의 복합적인 변곡점을 선생님들은 그냥 하시는데도 개연성 있게 넘어가지더라. 젊은 배우들에게 역으로 적용해 디테일을 찾아가는 계기가 됐다”고 귀띔했다.

44년 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초연 함께했죠 

호흡은 척척이란다. 여행 예능 ‘꽃보다 할배’(tvN)로 친분이 알려진 이순재‧백일섭은 요즘도 연극 ‘장수상회’ 더블 캐스트로 번갈아 무대에 서고 있다. 두 사람의 무대 인연은 1978년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한국 초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일보‧TBC 창립 13주년 기념 공연으로, 당시 백일섭이 레트 버틀러 역을 맡았다. “여자 주인공 스칼렛을 유지인 양이 했고 난 그 아버지였죠. 그 다음에 우리가 드라마는 정말 많이 같이했지” 이순재의 말에 백일섭이 “서로 눈만 보면 안다”고 거들었다.

연극 '아트' 포스터 [사진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나인스토리]

연극 '아트' 포스터 [사진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나인스토리]

tvN 시트콤 ‘감자별 2013QR3’(2013), SBS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2016) 등 이순재와 부자지간으로 수차례 만난 노주현은 “우리가 저 20대 때 만났으니 진짜 가족 같다”는 그는 “모처럼 형님들 모시고 하는데, ‘저 양반들 하는 연극이 참 좋았다’는 얘길 듣고 싶다”고 했다.

백일섭 "우정 권태기 연구하다 변비 생겨…실제로 닮아"

캐릭터는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고. “극 중 이반이 나를 보고 쓴 것 같다”는 백일섭은 “친구 사이에도 부부처럼 권태기가 있는 것 같다”면서 극 중 친구들 싸움에 끙끙 앓는 이반의 심정을 고민하다 “변비가 다 생겼다”고 했다. 이순재는 그에 대해 “속에 알맹이를 다 갖고 있으면서도 어눌한 척 잘하는 게 이반과 닮았다”고 부연했다. 이순재는 마크에 대해선 “주장이 강하다. 난 작품 할 때 영 비뚤게 나가는 건 가만 안 둬도, 개인적인 실수는 뭐라 얘기하지 않는데 마크는 세르주가 산 그림을 결국 따져서 분쟁을 만든다”고 자신과 비교했다. 실제 미술에 관심이 많다는 노주현은 스스로 “쉽게 못 넘어가는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이랄까. 셋 중 세르주랑 제가 제일 닮았다”고 했다. “집안에 화가(누나)가 있기도 하고 울림이 오는 작품이 있거든요. 안목도 자꾸 길러지지 않으면 안 돼요. 살아온 환경이나 여건이 다른데 ‘아트’는 예술작품 하나로 우정이 부딪히고 풀어지는 걸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죠.”(노주현)

연극 '아트' 시니어팀 캐스팅[사진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나인스토리]

연극 '아트' 시니어팀 캐스팅[사진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나인스토리]

성 연출에 따르면, 극중 대각선 상흔이 몇 개 난 캔버스 작품은 미국 화가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2008)의 백지에 가까운 작품 등 실제 예술작품에서 따온 것. 이순재는 “안 보이는 것에서 보게 되는 상상력과 깊이, 예술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이 연극의 중요한 포인트”라면서 “우정도 서로 다른 각자가 조화 속에 참여하는 것. 독자성만 주장하면 오래갈 수 없고 항상 나를 낮춰야 하는 것”이라 풀이했다. ‘아트’의 이런 주제가 시니어 버전에서 더욱 잘 살아나는 이유다. “젊은 친구들은 용모나 의상도 비슷한데 우린 뭐 뚜렷이 다르잖아요. 나잇대별로 색깔이 다른 게 이번 연극의 볼거리죠.”(이순재)

88세 노익장 이순재 "죽어가던 무당도 굿판 가면 뛰듯"

연극 '아트'로 뭉친 배우 노주현, 이순재, 백일섭. 50년 넘는 연기 인생을 함께해온 동지이자 가족같은 사이다. 권혁재 기자

연극 '아트'로 뭉친 배우 노주현, 이순재, 백일섭. 50년 넘는 연기 인생을 함께해온 동지이자 가족같은 사이다. 권혁재 기자

최근 공연계는 노년 배우들의 작품 활동이 활발하다. 신구(86)‧정동환(73) 등이 주연한 연극 ‘두 교황’이 지난달 30일 개막했고, 이순재‧백일섭‧손숙(78) 등의 ‘장수상회’가 오는 17~18일, 오영수(77)‧박정자(80)의 ‘러브레터’도 다음 달 6일부터 막을 올린다. “‘꼰대’들의 향연”이란 백일섭의 우스개에 이순재는 “나이 먹은 배우들도 중심이 돼서 한다는 게 의미 있다. 작품들이 다 좋다”며 반겼다. 지난해 3시간 가까운 연극 ‘리어왕’을 홀로 이끄는 등 꾸준히 무대에 선 이순재가 대표주자다. 올해 들어서만 ‘장수상회’ ‘사랑해요 당신’ ‘바람, 다녀가셔요’ ‘아트’까지 4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옛날에 무당이 다 죽어가도 굿판에 가면 뛴다 했죠. 우리를 보고 일명 굿쟁이라고도 하잖아요. 무대만 깔아놓으면 새로운 힘이 나죠. 그게 배우들의 생명력이요.”(이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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