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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육사는 건축 거장들의 '건축 맛집'…40년 전 스타일에 '홀릭'

중앙일보

입력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타워가 우뚝 솟았다. 옆에서 “높이가 몇 미터로 보이느냐”고 묻는다. 고개를 갸우뚱, 아뿔싸, 정답은 ‘64(육사)m’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이 육사기념관은 건축가 김수근(1931~1986년)의 작품이다.

육군사관학교 정문에서 가까운 육사기념관은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해 1986년 완공했다. 기념관은 '육사'를 상징하는 의미로 64m로 지어졌다. 김상진 기자

육군사관학교 정문에서 가까운 육사기념관은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해 1986년 완공했다. 기념관은 '육사'를 상징하는 의미로 64m로 지어졌다. 김상진 기자

육사는 시쳇말로 ‘건축 맛집’이다. 김수근뿐 아니라 김중업(1922~1988년), 이광노(1928~2018년), 김종성(87)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물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한 육사는 태릉골프장과 합쳐 부지 넓이가 약 45만평(149만 6979㎡)에 이른다. 드넓은 녹지와 병풍처럼 둘러싼 불암산 등 바위산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이 너른 공간을 현대 건축의 거장들이 캔버스처럼 쓴 셈이다.

영욕의 역사 지닌 ‘교훈탑’  

육사기념관은 ‘챔피언 벨트’ 마냥 번쩍이는 동판을 1층 외벽에 두르고 있다. 1기생부터 지난 3월 졸업한 78기생까지 모든 졸업 생도의 명단이 새겨진 동판들이다.

그만큼 오래된 동판일수록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무수히 많은 생도의 이름 중 뭇사람의 손을 가장 많이 탄 것은 11기생 ‘전두환’이었다. 공교롭게도 육사기념관의 별칭은 ‘교훈탑’이다.

육사기념관 1층 외벽은 육사 졸업 생도 전원의 명단이 새겨진 동판들이 둘러싸고 있다. 김상진 기자

육사기념관 1층 외벽은 육사 졸업 생도 전원의 명단이 새겨진 동판들이 둘러싸고 있다. 육사 11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이름은 닳아서 윤곽만 남은 상태다. 김상진 기자

그에 걸맞게 기념관 내부에선 생도들의 귀감이 되는 육사 선배들의 무훈을 엿볼 수 있다. 특히 6ㆍ25 전쟁 당시 13명의 육사 1ㆍ2기생을 주축으로 꾸린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육사의 정신적 지주다. 호랑이는 당시 이들의 암호명이다.

유격대는 서울로 진격한 북한군에 맞서 1950년 6월 29일부터 3개월여간 불암산 일대 동굴을 근거지로 후방 교란 작전을 폈다. 북한군을 네 차례 공격하고 100여명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등 큰 공을 세웠지만, 정작 자신들은 서울이 수복되기 전 모두 전사했다.

육사기념관 1층 전시관에는 6·25 전쟁 당시 불암산 유격대 활동을 하다가 전사한 생도들의 철모 등 유품이 전시돼 있다. 김상진 기자

육사기념관 1층 전시관에는 6·25 전쟁 당시 불암산 유격대 활동을 하다가 전사한 생도들의 철모 등 유품이 전시돼 있다. 김상진 기자

기념관에는 당시 생도들이 썼던 철모 등 유품이 전시돼 있다. 철모엔 3분의 1쯤 잘려나간 ‘육사’ 마크가 선명했다. 여러 발의 총탄이 뚫고 지나간 자리엔 녹이 더 많이 슬었다.

기념관은 육사 개교 40주년을 맞은 1986년 지어졌다. 개관 당시엔 지하에 식당을 갖추고 꼭대기는 전망대로 꾸며 타워 기능에 충실했다고 한다. 현재 식당은 사라졌지만, 전망대는 그대로다.

육사기념관 전망대에선 육사 교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김상진 기자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바라본 육사기념관. 김상진 기자

전망대에선 육사 교정은 물론 녹지로 가득한 주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육사 관계자는 “불암산에서 시작한 능선이 물 흐르듯 넘어가는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서울 시내 유일한 장소”라고 치켜세웠다.

‘김중업 스타일’ 돋보이는 박물관

육사기념관보다 3년 앞서 완공된 육군박물관은 건축가 김중업의 스타일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에 하늘을 향해 솟은 콘크리트 처마를 올렸던 그이기에, 박물관 외벽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사무동 외벽에 기와색을 입힌 삼각 벽돌로 입체감을 살리고, 전통 악기인 편종의 이미지를 차용해 장식미가 돋보이는 우수관을 설치했다. 이 삼각 벽돌은 벽돌 장인이 기와를 만들 때 쓰는 전통 가마 방식으로 구웠다고 한다.

김중업 건축가가 설계한 육군박물관은 1983년 완공됐다. 사무동 외벽은 기와색 삼각 벽돌로 장식됐다. 우수관처럼 보이는 것은 전통 악기인 편종의 이미지를 본뜬 것이다. 김상진 기자

육사박물관 사무동 외벽에는 전통 악기인 편종의 이미지를 본뜬 우수관이 설치돼 눈길을 사로잡는다. 김상진 기자

지은 지 40여년, ‘보수할 벽돌이 있느냐’는 염려에 “건축 당시에 오랜 세월 사용할 수 있도록 벽돌을 충분히 구비해뒀다”(박물관 관계자)는 답이 돌아왔다.

박물관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원통 모양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빈 공간을 중정(中庭)으로 꾸몄다. 당초 중정엔 분수가 설치돼 있었지만,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현재 철거된 상태다.

김중업 건축가가 설계한 육군박물관의 외관. 원형 건물을 생도의 모습을 형상화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구조다. 김상진 기자

김중업 건축가는 육사박물관 가운데 빈 공간을 중정(中庭)으로 만들었다. 여기엔 당초 분수가 설치돼 있었다. 김상진 기자
육군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6·25 전쟁 당시 노획한 소련제 45mm 대전차포 등이 원형 그대로 전시돼 있다. 김상진 기자

중정 외곽은 야외 전시장이다. 생도들이 건물을 떠받치는 모양을 형상화한 기둥들 사이로 19세기 청(淸)의 화포인 홍의포(紅衣砲)에서부터 옛 일본군의 38식 야포, 소련제 45mm 대전차포 등 노획 무기들이 원형 그대로 전시돼 있다.

3층 구조의 박물관에 들어서면 빛에 반사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들어온다. 형식은 서양의 것이지만, 내용은 한국적이다. 사물놀이와 궁중음악 등을 형상화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육사박물관 1층 모습. 왼쪽에 전시된 차량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후반 타던 의전 차량이다. 3층 건물의 안쪽에 빛이 잘 들어오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김상진 기자

육사박물관에 들어서면 빛에 반사된 스테인드 글래스가 눈에 들어온다. 궁중음악 등 한국적인 모습을 담았다. 김상진 기자
육사박물관 1층에 전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전 차량. 캐딜락 프리트우드75 기종으로 1968년에 제작된 방탄 차량이다. 박 전 대통령이 재임 후반기에 썼다. 김상진 기자
육군박물관에는 고종이 쓰던 활과 화살통이 전시돼 있다. 김상진 기자
육군박물관에 전시된 대한제국군의 군복. 김상진 기자
육군박물관에는 베트남 전쟁 관련 자료도 많다. 전쟁 당시 주월한국군 최초 장교 전사자였던 고 안정태 대위가 입었던 전투복이 전시돼 있다. 김상진 기자

육군박물관은 군사 문화재의 보고다. 고대부터 최근까지 사용된 각종 무기와 군사 자료들로 가득하다. 박물관 관계자는 “도검과 군복 셀렉션 등은 자타공인 국내 최고”라며 “최근까지도 많은 분이 기증해 문화재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

생도들 ‘애정하는’ 우당도서관

육사 학교본부(1980년 완공)를 설계한 이광노의 대표작은 여의도 국회의사당(1975년 완공)이다. 5년 간격으로 지어진 두 건물은 외관상 많이 닮았다.

연면적 6000㎡의 육사 본부 역시 전면에서 보면 6개의 거대한 원형 기둥이 건물을 지탱하는 모습이다. 단, 국회의사당과 달리 건물 중앙에 돔형 천정은 없다.

이광노 건축가가 설계한 육군사관학교 본부는 1980년 지어졌다. 1975년 완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양식이 유사하다. 김상진 기자

이광노 건축가가 설계한 육군사관학교 본부는 1980년 지어졌다. 1975년 완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양식이 유사하다. 김상진 기자

생도들이 가장 ‘애정한다’는 우당도서관의 겉모습은 1982년 지어질 당시 그대로이지만, 안은 완전히 다르다. 2000년대생 생도들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최근 리모델링을 마쳤다.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부탁으로 서울 남산 밀레니엄 서울 호텔을 설계했던 김종성 건축가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기에 군더더기가 없다. 이 도서관 역시 김우중 회장이 지원해 건립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이용하는 우당도서관 앞에는 육사 창설지를 나타내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김상진 기자

육군사관학교 우당도서관 내부. 2층 유리천정으로 들어온 빛이 지하 열람실까지 닿도록 설계됐다. 김상진 기자
육군사관학교 우당도서관 지하 열람실. 2층 유리천정으로 들어온 빛이 지하 열람실까지 닿도록 설계됐다. 김상진 기자

건물 설계에서 돋보이는 것은 자연 채광이다. 2층 유리 천정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지하 열람실까지 닿도록 설계됐다.

도서관 명칭인 우당(愚堂)은 김 회장의 선친인 김용하 선생의 아호다. 육사 관계자는 “원래 외벽에 한자로 돼 있던 명칭을 이번에 리모델링하면서 한글로 바꾸었다”고 귀띔했다.

이외에도 육사 영내에는 조선 말 군사기관인 삼군부의 청사로 쓰인 청헌당(淸憲堂), 강석원 건축가가 설계한 화랑대 성당, 서울시건축상을 받은 원불교 화랑대 교당 등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영내에 있는 조선 말 군사기관인 삼군부의 청사인 청헌당. 1868년(고종 5년) 광화문 앞에 세워졌다. 1967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를 지으면서 육사로 옮겼다. 김상진 기자

육군사관학교 영내 야외 전시장에는 육군이 사용했던 각종 무기가 전시돼 있다. 김상진 기자
육군사관학교 영내 국방경비대 1연대 창설 기념비. 국군의 모체인 1기계화보병여단은 1946년 1월 15일 현 육사 부지 안에 국방경비대 1연대로 창설됐다. 김상진 기자

문제는 이같은 훌륭한 건축물들을 자유롭게 들여다볼 수 없다는 점이다. 육사도 엄연한 군사시설이어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간 코로나19로 멈췄던 인터넷 관광예약은 되살아났다. 육사 홈페이지를 통해 최소 3일 전 예약하면 2시간 정도 안내를 받으며 육군박물관, 야외 무기 전시장 등을 견학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육사 측은 “생도들의 학습권을 해치지 않으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상시 개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며 “지방자치단체와 관련 협의를 계속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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