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 최고위원으로 지명했던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가 전격 사퇴한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 뒷말이 무성하다. 신임 최고위원이 지명 당일 물러난 것 자체가 전례없는 일인데다, 박 교수 본인도 사의를 밝히기 직전까지 언론 인터뷰에서 “사심 없이 바른말을 하겠다”며 의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단 박 교수가 밝힌 사의 이유는 ‘국립대 교수’라는 자신의 신분 문제다. 5일 오전에 임명됐던 박 교수는 당일 밤 박성준 당 대변인을 통해 “국립대 교수로서 특정 정당의 최고위원을 맡는 것이 적절치 않고, 학생들의 교육에 전념할 수 없다는 주위의 만류가 있었다”고 밝혔다. 현행법상 국립대학 교원은 공무원의 지위를 갖는다. 당연히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할 수 없다. 박 대변인도 6일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교수가) 고심 끝에 수락하기는 했었는데, 수락한 이후 여러 얘기가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런데 박 교수는 5일 오후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해관계 당사자가 아니어서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학자로서 소신 있게 발언하겠다”고 말했다. 이때만 해도 사퇴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당내에선 박 교수가 휴직하지 않고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민주당 관계자는 “국립대 교수는 신분상 안 된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조국 전 법무장관이 2015년 서울대 교수 신분으로 혁신위에 참석한 선례 탓에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초 이 대표는 당 안팎에서 추천한 복수의 광주·전남 인사를 놓고 지명직 최고위원을 고심해 왔다. 그러던 중 당 핵심 인사가 박 교수를 염두에 두고 “전남대 철학과 교수가 있다”고 운을 떼자, 이 대표가 “박구용 교수요”라며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박 교수는 지난 1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홀에서 열린 ‘더 나은 민주당 만들기’ 타운홀 미팅에서 사회를 맡아 이 대표와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박 교수는 “헤겔이 전쟁 중에 나폴레옹을 보고 ‘새로운 시대 정신이 나타났다’고 말했는데, 이 대표가 들어오는 걸 보니 ‘여러분께 이 대표가 새로운 시대정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차이트가이스트(Zeitgeist·시대정신) 이재명”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대표 측은 “그 전까지 직접 알던 사이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당내에선 “국정감사를 앞두고 전남대 측이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민주당의 한 수도권 의원은 “사실상 여야 전면전이 시작됐는데, 국립대 교수가 야당 최고위원이 되면 여당이나 교육부가 가만히 있겠느냐”라며 “최고위원이 되었다면 연구비부터 제자 논문까지 죄다 파헤쳐 공세를 퍼부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박 교수가 개인적 문제가 불거져 그만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박 교수의 급작스러운 사의로, 민주당은 6일 저녁 다시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서은숙 부산시당 위원장과 전남대 출신 임선숙 변호사를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새로 지명했다. 각각 영·호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안호영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박 교수 대신 호남권 인사로 지명된 임 변호사에 대해 “호남 지역 대학 출신 최초의 여성 사법시험 합격자”라며 “광주여성민우회장으로 광주 지역 신망이 높다. 호남 지역과 여성 시민의 모습을 당에 반영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라고 설명했다. 두 지명자는 민주당 당무위 인준 절차가 끝나는 대로, 향후 2년간 이 대표와 함께 민주당을 이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