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만주 곳곳 둥지 튼 일본 개척단, 패망 후 집단자살 내몰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0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2〉

1903년 1월, 러·일 전쟁을 앞두고 전투가 벌어질 지역을 답사하는 일본군 장교. [사진 김명호]

1903년 1월, 러·일 전쟁을 앞두고 전투가 벌어질 지역을 답사하는 일본군 장교. [사진 김명호]

1904년 2월 초순 인천 앞바다, 미국과 영국의 지지를 확인한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함정을 격침했다. 육군도 여세를 몰았다. 러시아 관할구역 뤼순(旅順)을 봉쇄했다. 러·일 전쟁의 막이 올랐다.  교전 쌍방이 중국 경내를 전투지역으로 선택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별난 전쟁이었다. 청나라는 자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백곰과 원숭이의 싸움을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중립을 선언했다.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의 독무대였던 동북 남부(남만주)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우매하고 산만한 민족” 중국인 무시

소풍 나온 개척여숙의 일본인 개척단원. [사진 김명호]

소풍 나온 개척여숙의 일본인 개척단원. [사진 김명호]

러·일 전쟁 발발 전, 뤼순과 다롄(大連) 지구에는 300명가량의 일본인이 있었다. 대부분 철도, 광업 관련 기술자 등 월급쟁이였다. 자영업자와 머리구조 복잡한 대륙낭인(大陸浪人)은 극소수였다. 남만주철도(만철) 초대 총재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는 만주의 잠재력에 입이 벌어졌다. 가는 곳마다 일본 국민의 만주이민을 권장했지만 허사였다. 일본인들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형수나 숙모, 옆집 부인과 눈이 맞거나 대형 사고를 치지 않는 한 만주이민은 턱도 없었다.

1930년, 전쟁 승리 근 30년이 지나자 다롄 일대의 일본인이 21만5000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만주에 이민 온 일본인들은 수준이 높고 자부심이 강했다. 일본 매체에 대놓고 중국인을 무시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우매하고, 더럽고, 게으르고, 산만한 민족이다. 일본 같은 고등민족이 구원해 주지 않으면 대책이 없다”는 투였다.

만주국은 일본 농민들에게 희망의 땅이었다. 만주로 향하는 일본의 개척단원. [사진 김명호]

만주국은 일본 농민들에게 희망의 땅이었다. 만주로 향하는 일본의 개척단원. [사진 김명호]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 관동군이 광대한 동북을 점령했다. 일본은 동북에서 약탈한 소금, 콩, 석탄, 광물을 다롄항 통해 일본 국내로 운송했다. 양이 엄청났다. 석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바닷가에 방치할 정도였다. 고토 신페이의 예언이 적중했다며 일본에 만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32년 10월 초, 일단의 일본 퇴역군인들이 다롄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5일 후 쑹화(松花)강 하류의 자무스에 도착, ‘자무스둔간대대(佳木斯屯墾大隊)’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지린(吉林)성에도 간척사업 하겠다는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4년 만에 일본이민이 50만명으로 늘어났다. 그중 3000명은 철도 연변에 진을 친 무장이민이었다. 철공소와 탄광, 유리, 방직, 시멘트, 성냥공장에서 일본인을 공모한 결과였다.

이쯤 되자 일본 내각과 관동군이 만주이민을 국책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1935년 만주국, 남만주철도,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가 공동으로 출자해 만주척식주식회사(滿拓)를 설립했다. 만척의 중요 임무는 만주이민 모집이었다. 20년 안에 100만 가구 500만명의 만주 이전이 최종 목표였다. 당시 일본 척무성의 발표를 소개한다. “현재 만주국의 인구는 약 3000만명이다. 20년 후 5000만명으로 증가한다. 일본인이 명실공히 만주의 5개 종족 중 하나로 정착하려면 적어도 500만명은 돼야 한다.”

기아·전염병·자살 등 5000명 넘게 숨져

만주국 시절 동북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 [사진 김명호]

만주국 시절 동북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 [사진 김명호]

일본은 만주이민 장려하며 선전에 열을 올렸다. “이민자들에게 충분한 토지와 주택, 마차, 농기구를 제공한다. ‘개척단’으로 참가하는 청년 남성들에겐 병역을 면제하고 10년간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 만주 곳곳에 일본개척단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개척단은 외부와 단절된 세계였다. 철조망과 토담 쌓고 중국인 출입을 금지했다. 내부에 간장 공장, 양조장, 병원, 학교 등 있을 건 다 있었다. 매주 한 차례 의사가 다녀가고 공중 목욕탕도 멀쩡했다. 중심 지대에 학교도 있었다.

중국의 동북지역에 뿌리를 내리려면 중국에서 태어난 일본 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대륙 신부’ 정책을 폈다. 만주국에 거주할 17세 이상 25세 미만의 미혼 여성들을 모집했다. 1년간 영농(營農)과 가사실습 시킨 후 개척단 일원으로 만주에 파견했다. 여성 개척단원들은 만주에 도착한 후에도 12개 개척여숙(開拓女塾)에서 중국어와 댄스 교육을 받고 개척단원과 가정을 꾸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정부가 투항을 선포했다. 만주국을 위시한 동북의 식민통치 기구는 순식간에 와해됐다. 관동군은 개척단에게 집단 자살을 요구했다. 외무성의 훈령도 가혹했다. “송환을 거론할 시점이 아니다. 현지에서 대기해라.” 개척단원들을 갈 곳이 없었다. 기아와 전염병으로 쓰러지고 자살도 부지기수였다. 여인들은 강보에 쌓인 자녀들을 중국 부인들에게 맡기고 산길과 들판을 헤맸다. 5000명 이상이 지명도 모르는 곳에서 인간 세상을 뒤로했다.

중국인들이 거둔 일본 아동들은 1972년 9월 중·일 수교 후 일본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 본인과 일본의 부모나 친인척, 만주에서 키워준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거의 귀국을 택했지만 다시 동북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유가 비슷했다. “중국 엄마가 그리웠다. 보고파서 숨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릴 때 다른 애들은 팔다리에 모기 물린 자국이 가득했지만 나는 깨끗했다. 여름만 되면 중국 엄마는 내 옆에서 부채로 모기 쫓느라 밤을 새웠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