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관원·무관·상인·낭인들, 중국 곳곳 누비며 간첩 활동

중앙선데이

입력 2022.09.1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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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3〉

벼 재배에 성공한 다웨이자툰 파출소의 일본인 경찰과 중국인 직원. [사진 김명호]

벼 재배에 성공한 다웨이자툰 파출소의 일본인 경찰과 중국인 직원. [사진 김명호]

청말(淸末), 중국은 덩치만 큰, 병든 노인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이라는 이웃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은 달랐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지리와 풍속, 생활 습관을 이해하기 위해 기를 썼다. 100여 년간 중국인보다 중국을 더 잘 이해하는 중국통(中國通)을 부지기수로 배출했다. 이유는 단 하나, 중국의 광활한 영토에 대한 야욕 때문이었다. 중국을 제 손바닥 보듯 하기까지 40년이 걸렸다.

1871년 9월, 메이지 유신 3년 8개월 후 텐진(天津)에서 청·일 양국이 머리를 맞댔다. 중일수호조규(中日修好條規)와 통상장정(通商章程)에 서명했다. 상호 영사관 설치를 약정하고 무역을 위한 상인과 민간인의 왕래도 허락했다. 일본인들이 중국 드나들며 정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894년 갑오년(甲午年), 우리의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1차 중·일(청·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20여 년간 중국 대도시의 일본 영사관 관원과 무관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단체와 민간조직, 상인, 종교인, 낭인들은 깡그리 중국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

주중 무관, 2년 새 청국북경전도 등 완성

만주로 이전한 일본이민들의 망중한(忙中閑). [사진 김명호]

만주로 이전한 일본이민들의 망중한(忙中閑). [사진 김명호]

중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넓었다. 가는 곳마다 언어, 생활습관, 미인과 미남의 기준까지 제각각이었다. 간첩들은 지역 고위관료 개개인의 취향과 인간관계, 군 주둔지의 병력과 장비, 도로, 기후, 문화, 종교, 파악에 머리를 싸맸다. 군인들이 극성을 떨었다. 300년 전 중국을 넘보다 조선에서 주저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장교가 한둘이 아니었다.

1872년 봄, 전도유망한 육군 장교 한 명이 약혼녀에게 파혼을 통보했다. 그림 잘 그리는 부하 2명과 함께 상인과 여행객으로 위장해 중국을 누볐다. 상하이(上海)와 산둥(山東), 특히 동북(東北) 지역을 비밀리에 정찰했다. 귀찮게 구는 촌구석 말단 관리들은 구워삶기 쉬웠다. 아편이나 부인들 주라며 은반지 몇 개 주면 나가떨어졌다. 길 안내를 자청하며 묻지 않는 것까지 친절히 알려줬다. 군부대 위치와 기후, 지형, 교통, 하류의 결빙(結氷)과 해동(解凍)시기 등 각종 정보가 담긴 지도를 완성했다. 해양훈련 교관 출신은 중국 해안지역과 대만을 정찰하며 예술작품 같은 지도를 만들었다. 일본군은 훗날 이 지도에 담긴 정보를 토대로 대만 침략 계획을 세웠다. 주중 무관은 역사적 명승지 유람을 이유로 베이징과 후난성(湖南)성을 샅샅이 훑었다. 2년 만에 청국북경전도(淸國北京全圖)와 청국호남성도(淸國湖南省圖)를 완성했다.

다롄의 일본 관동도독부. [사진 김명호]

다롄의 일본 관동도독부. [사진 김명호]

훗날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도독을 역임한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는 외국어의 천재였다. 영·불·독·중·러시아어에 능했다. 1879년 육군 중위 시절 만주족으로 위장했다. 변발(辯髮)에 중국인 노동자 복장 차림으로 베이징, 텐진, 상하이, 내몽골을 5개월간 떠돌며 정탐했다. 청 왕조에 대한 판단을 본국에 보고했다. “청국은 뇌물 주고받기가 도를 넘었다. 만악의 근원인 치명적인 약점을 이 나라 사람들은 반성할 줄 모른다. 위로는 황제와 대신(大臣)에서 졸병들까지 예외가 단 한 사람도 없다. 불치의 병에 걸린 청나라는 일본의 상대가 못 된다.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1880년부터 7년간 중국을 정탐한 일본군 소좌는 본국에 청나라정벌방안(征討淸國策)을 보냈다.  내용이 가관이었다. 1886년 청나라의 국고 수입과 국방예산, 100여 개 항구의 포대와 지형, 우물의 위치와 수심에 관한 정보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고토 “만철, 동인도회사처럼 능력 충분”

1914년 봄, 육군 대장으로 승진한 ‘일본 정보계통의 아버지’ 후쿠시마 야스시마. [사진 김명호]

1914년 봄, 육군 대장으로 승진한 ‘일본 정보계통의 아버지’ 후쿠시마 야스시마. [사진 김명호]

청·일 전쟁 전, 청나라 해군은 손색이 없었다. 북양수사(北洋水師)도 갖출 것은 다 갖춘 상태였다. 농민으로 위장한 일본군이 북양함대 소재지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잠입해 북양수사의 신호와 암호해독 서적을 몰래 훔쳐갔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비싼 돈을 주고 산 군함들이 맥도 못 추고 침몰하는 것이 당연했다.

전쟁 승리 후 일본 상층부에 ‘대륙 이민’을 조심스럽게 거론하는 사람이 한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승세를 몰아 러·일 전쟁 마저 승리하자 일본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러시아가 관장하던 관동지역에 관동도독부를 신설하고 식민통치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만철 초대 총재로 부임한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는 식민지 착취에 관심이 많았다. 대만총독부 민정장관 시절 총독에게 묘한 의견을 낸 적이 있었다. “영국은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합법적인 무역과 상업을 명분으로 인도의 무궁무진한 보물을 약탈해 본국으로 보냈다. 만철은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했던 역할을 중국에서 감당할 능력이 충분하다.”

고토는 취임식에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만철의 임무는 철마(鐵馬) 경영과 광산개발, 이민, 목축업 발전 4가지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민이다.” 당시 관동 도독이 후쿠시마 야스마사였다. 후쿠시마도 고토의 구상에 공감했다. 뤼순(旅順)과 다롄(大連) 주변에서 벼농사에 적합한 곳을 물색했다. 다롄 교외 진저우(金州)의 다웨이자툰(大魏家屯)지구가 토질이 비옥하고 벼농사에 적합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현지 파출소 순사(경찰)가 벼농사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주저하지 않았다. 즉석에서 결정했다. “만주에 오는 일본이민의 거점이 필요하다. 다웨이자툰에 일본이민 모범촌을 건설해라.” 일본 농상무성(農商務省)의 세밀한 조사 결과도 후쿠시마를 만족시켰다.

첫 번째 만주이민은 빈농지역 주민으로 국한했다. 야마구치(山口)현이 후보로 떠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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