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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치금융에 눈치코치 규제…론스타에 수천억 공격 빌미 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 한국 정부 사이에 10년간 이어진 분쟁이 2800억원 배상으로 일단락됐다. 외환은행 인수 뒤 배당과 매각 차익으로 4조7000억원의 차익을 손에 쥐고도 론스타는 국제투자분쟁(ISDS) 소송을 제기했다. 론스타가 6조원이 넘는 배상을 요구했던 걸 고려하면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3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 판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3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 판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배상액은 차치하고서라도 2003년 외환은행 인수부터 시작해 '20년 악연'이 이어지는 겪은 각종 논란과 갈등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가 치른 비용은 결코 적지 않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미성숙했던 한국 자본시장, 정부의 관치금융 그리고 일관성 없는 잣대(규제) 등이 빌미를 줬다고 진단한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악연은 미숙한 자본시장이란 시대적 상황 속에서 비롯됐다. 2002년 당시 외환은행이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왔지만, 외환위기 여파에 선뜻 나서는 기업은 없었다. 대규모 인수 자금을 끌어올 경영 참여형 사모펀드(PEF) 시장도 걸음마 단계였다. 론스타가 경쟁 입찰을 거치지 않고 외환은행을 품을 수 있었던 이유다.

론스타뿐이 아니다. 외환은행처럼 경영 위기에 처한 기업을 싼값에 인수한 뒤 경영을 정상화해 비싼 값에 되파는 외국계 벌처펀드가 몰렸다. 1999년 타이거펀드의 SK텔레콤 공격을 시작으로 소버린자산운용, 아이칸 등 굵직한 벌처펀드가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시엔 재무적투자자(FI) 등을 모아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시도조차 어려울 만큼 자본시장은 규제나 제도 면에서 미성숙했다”고 평가했다. 익명을 요구한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도 “당시 토종 PEF 시장은 초기라 자금 규모나 운용 측면에서 외국계 자본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론스타에 데인 정부는 외국계 투기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토종 PEF 육성을 2004년 법제화했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논란이 일기 시작한 건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이듬해(2004년)다. 외환은행 주가가 뛰면서 론스타는 1조원 상당의 평가차익을 거뒀다.

외국계 자본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커지자 정치권이 가세했다. 당시 최경환 한나라당 의원은 2005년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외환은행 헐값매각을 주도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국회의 감사 청구로 감사원은 2006년 특별 감사에 나섰고 감사원은 그해 6월 외환은행이 헐값 매각됐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검찰은 헐값 매각 수사에 착수했다.

이어 론스타가 인수 금액의 3배 수준(6조원 이상)에 외환은행을 팔겠다고 나서면서 '헐값 매각','먹튀' 논란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금융당국과 론스타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론스타 측은 당시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부당하게 미루고 매각 가격 인하를 압박하는 바람에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반면 우리 정부는 대주주 적격성 관련한 외환카드 주가조작 재판이 이어지는 상황이라 인수 승인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 론스타 사건의 중재 판정부는 “(한국) 금융당국이 매각 가격이 인하될 때까지 승인을 지연한 행위는 (한국의) 권한 내 행위가 아니므로, 공정·공평 대우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며 론스타 측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다만 주가조작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난 만큼 론스타 측의 책임도 있다며 과실 상계를 통해 배상 요구액의 절반만 인정했다.

이에 따라 법무부가 이번 판정에 이의 제기를 하기로 한 만큼 최종 결정이 나야겠지만, 우리 정부의 과실을 인정한 부분에 대해선 책임 소재를 따질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법적인 충분한 근거 없이 민간기업의 M&A 같은 경쟁에 정부가 개입하는 건 리스크가 있다”며 “국내외 자본이 경쟁하는 시대에 과거와 같은 관치금융은 국제 소송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여론에 따라 오락가락했던 금융당국의 규제 역시 론스타 측에 공격의 빌미를 줬다는 분석이다. 론스타가 산업자본이냐의 여부에 대한 판단이 대표적이다. 은행법에 따르면 ‘은산분리’로 산업자본이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을 4% 이상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 등 특별한 사유로 론스타의 인수를 승인했다. 당시 외환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6.16%)이 8% 밑으로 떨어지는 등 부실 우려가 커졌다고 판단하고 예외를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인수 2년 뒤 해당 BIS 비율이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헐값 매각 논란은 불법 매각 논란으로 확대됐다.

론스타가 2012년 외환은행을 하나금융에 팔 때도 금융당국은 “론스타는 2010년 말 기준 산업자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현시점에서 론스타를 산업자본으로 볼 근거는 없다”고 애매모호한 결론을 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의 규제 잣대가 일관성이 없다 보니 국제 분쟁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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