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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정책의 역설’…밀려나는 취약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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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지난 24일 경기 수원시 장안구에 은행 대출 금리를 알리는 광고 현수막이 걸려 있다. [뉴스1]

지난 24일 경기 수원시 장안구에 은행 대출 금리를 알리는 광고 현수막이 걸려 있다. [뉴스1]

금리 인상기를 맞아 정부·정치권이 금리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앞다퉈 펼치는 정책이 오히려 대출 취약계층을 제도권 밖으로 몰아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이른바 ‘착한 정책의 역설’이다.

논란의 중심에 선 건 지난 22일 시작된 예대금리차 공시제도다.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를 매달 공개해 대출금리 인하를 촉진하는 제도다. 공시 제도를 시행하기도 전에 ‘약발’은 바로 나타났다.

하지만 예대금리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던 신한은행과 전북은행, 토스뱅크는 다른 은행보다 금융 취약계층에 대출 지원을 많이 한 결과라고 해명한다. 신한은행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5대 시중은행 중 가장 많은 9751억원의 서민 대출을 취급했다. 전북은행은 외국인 대상 신용대출을 업권 최초로 시행했다. 토스뱅크는 대출 고객 중 중·저신용자 비율이 약 38%로(7월 말 기준) 모든 은행 중 가장 높았다.

금융업계에선 ‘예대금리차 줄 세우기’가 취약계층에 대한 대출 약화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대출 금리) 평균을 내리는 손쉬운 방법은 고금리 서민대출 상품 같은 상품을 줄이는 것”이라며 “저신용 차주에 대한 비대면 신청을 대면으로 바꾼다거나, 한도를 줄이는 등의 소극적 영업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금융 당국은 “신용점수별 예대금리차와 평균 신용점수를 함께 발표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신용점수별 대출금리까지 들여다보는 고객은 별로 없다”며 답답해하는 분위기다.

30일 시작되는 ‘금리인하청구권 수용률 공시’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금융사는 이날부터 업권별 협회·중앙회 홈페이지에 금리인하요구 신청 건수와 수용 건수, 수용률, 이자 감면액 등 4가지 항목을 6개월마다 공개해야 한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금리 인하 청구권 수용률이 낮은 금융사는 미리 신용정보를 더 확보하고 평가를 정교하게 잘한 곳일 수도 있는데, 무조건 수용률이 낮으면 나쁜 금융사로 낙인 찍힐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최근 ‘국정감사 이슈 분석’ 보고서에서 “수용률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신청을 적게 하게 해 수용률을 높이려고 금융사가 오히려 신청 안내 등을 소극적으로 할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착한 정책의 역설’을 보여주는 사례는 법정 최고금리 인하다. 문재인 정부는 가계부채 위험을 해소하고 취약 계층의 이자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법정 최고 금리(대부업, 시행령 기준)를 기존 27.9%에서 지난해 7월 20%까지 낮췄다.

금융사에서는 이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적용해야 할 신용도가 낮은 사람은 거절할 수밖에 없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 결과, 법정 최고금리를 2%포인트 인하하면 2021년말 기준으로 카드·캐피털·저축은행 신용대출을 받는 대출자 약 65만9000명이 비제도권 금융으로 밀려나게 된다. 법정 최고금리를 4%포인트 낮추면 약 108만4000명이 제도권 바깥으로 내몰린다. 그런데도 국회에서는 여야 불문하고 법정 최고금리를 더 내려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

전문가와 업계는 ‘착한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은행 관계자는 “평균 예대금리차 공시의 경우 햇살론 등 저신용대출을 제외하고 통계를 내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리인하청구권 수용률 공시와 관련해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업계를 위축시키는 공시보다 비대면 신청과 안내를 적극적으로 한 금융사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 등이 나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예대금리차와 금리인하요구권 수용률 공시는 소비자의 알 권리 측면에서 좋은 정책”이라면서도 “객관적인 정보 공개에 머물러야지 여기에 금융 당국이 가치를 부여하고 압박을 가한다면 시장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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