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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죽음, 눈앞서 본 '푸틴의 철학자'…"복수 그 이상 갈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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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두긴이 2018년 10월 18일 모스크바에서 돈바스 전투 관련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알렉산드르 두긴이 2018년 10월 18일 모스크바에서 돈바스 전투 관련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내 딸은 소중한 목숨을 제단에 바쳤다. 그러니 제발 승리해달라.”

푸틴의 신봉자인 러시아 정치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60)이 지난 20일(현지시간) 자신의 딸 사망 사고에 대해 처음 입장을 밝혔다. 워싱턴포스트(WP) 22일 보도에 따르면 두긴은 이날 러시아 극우방송 차르그라드TV 소유주 콘스탄틴 말로피브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의 마음은 단순한 복수나 보복 이상의 것을 갈망한다"며 "우리에겐 승리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딸 다리아는 차량 폭파 사고로 숨졌다.

두긴의 성명은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이 준비하고 실행했다”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발표 뒤에 공개됐다.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 요원 나탈리아 보브크(43)가 12살 딸을 데리고 모스크바에 들어와 두기나와 같은 아파트에 한 달간 살면서 차량에 폭탄을 설치했고 사고 직후 에스토니아로 탈출했다는 주장이다. 아조프 연대는 즉시 “보브크와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며 “(러시아의 이런 주장은) 아조프 대원들의 재판을 앞두고 여론을 조장하려는 속임수”라고 반박했다.

“두기나의 죽음, 러군 고무시켜야”

지난 20일(현지시간) 다리아 두기나(맨 오른쪽)가 사고 당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열린 민족주의 축제 '전통'에서 아버지 알렉산드르 두긴(왼쪽에서 두 번째)과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텔레그램 캡처]

지난 20일(현지시간) 다리아 두기나(맨 오른쪽)가 사고 당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열린 민족주의 축제 '전통'에서 아버지 알렉산드르 두긴(왼쪽에서 두 번째)과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텔레그램 캡처]

두긴 역시 이번 성명에서 “나치 우크라이나 정권이 자행한 테러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두기나를 ‘애국자’이자 ‘철학자’로 칭송하면서 “러시아의 적들은 비열하게, 은밀하게 두기나를 죽였다”며 “그러나 우리 국민은 어떤 타격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 중 가장 훌륭하고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피 묻은 테러로 우리의 의지를 꺾으려고 하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두기나의 죽음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싸우도록 고무시켜야 한다”라고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두긴에게 조문 메시지를 보내고 두기나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푸틴은 “(두기나의 죽음은) 비열하고 잔인한 범죄의 결과”라며 “그녀는 언론인, 과학자, 철학자, 전쟁 특파원으로 정직하게 국민과 조국을 섬겼고, 행동을 통해 러시아의 애국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명했다”고 썼다.

극우 사상가인 두긴은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강조하고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을 제공한 ‘유라시아니즘’(Eurasianism)의 창시자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기획자’로 꼽힌다. 이 때문에 두긴이 암살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지적했다. 두긴은 두기나 사고 당일 함께 차에 타려다가 뒤차를 타고 가다 두기나의 사고 장면을 목격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두기나가 탔던 차량도 두긴 소유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두긴을 노린 범죄에 딸이 희생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보수 언론인에서 극우 철학가로

알렉산드르 두긴이 지난 20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인근 고속도로에서 차량 폭발로 숨진 딸 다리아 두긴의 사고 현장을 지키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알렉산드르 두긴이 지난 20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인근 고속도로에서 차량 폭발로 숨진 딸 다리아 두긴의 사고 현장을 지키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두긴은 신비주의와 지정학에 심취한 보수 성향 언론인이었다. 90년대 소련 해체 전후로 러시아가 서방에 대항해 세계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극우 민족주의자가 됐다. 1993년 민족 볼셰비키당을 공동 창당했다.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건 1997년 유라시아 제국 비전을 제시한 저서 『지정학의 토대』를 출간하면서다. 이 책에서 그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합쳐질 운명이며 절대로 독립국가로 내버려둬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 스탠퍼드대학 후버 연구소의 존 던롭 선임연구원은 “러시아 군대와 경찰, 정부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푸틴의 열렬한 지지자다. 2000년 대선에서 푸틴을 지지한 뒤 국립지정학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2007년 저서 『푸틴 대 푸틴』에서는 “푸틴이 조심스러운 ‘달과 같은’ 속성과 유라시아 제국의 부활에 몰두하는 ‘태양과 같은’ 속성 등 두 가지 특질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했다. “푸틴은 절대적이고, 대체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내놨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 3월엔 “매우 기쁘다”며 “‘태양과 같은’ 푸틴의 승리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폭발 사고로 딸이 숨지기 직전에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러시아 사회 전체가 전시 조직 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며 “러시아는 하나의 문명으로서 서방에 대항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끝까지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글을 썼다. 두긴은 앞서가던 딸의 차량이 폭발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했고, 사고 현장에서 경찰과 구조대를 기다리면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모습이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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