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어둠 속 반지하 계단에서 미끄러진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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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윤석열 대통령은 9일 침수로 일가족 세 사람이 변을 당한 서울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 갔다. 창밖에 앉아서 방안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보도됐다. 참사 현장에 신속하게 달려간 것은 좋았다. 하지만 비극의 실체를 온몸으로 끌어안는 전면적 공감의 태도는 아니었다.

현장에 동행했던 인사에게 “대통령은 왜 안에 들어가지 않았는가”라고 물어봤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대통령이 만류를 뿌리치고 출입금지선인 폴리스 라인을 넘어 어둠 속 계단을 걸어 내려가 경호원들이 당황했다는 것이다. 도중에 미끄러져서 넘어질 뻔했고, 구두와 바지를 흙탕물에 적신 것도 알게 됐다.

경호원 뿌리치고 금지선 넘어가
국민 아픔 품으려는 대통령다움
모든 장관과 매주 1~2회 독대
‘나’를 버릴 때 여야 협치 가능

반지하방은 채광과 환기에 문제가 있다. 곰팡이, 벌레도 입주자를 괴롭힌다. 하지만 노모와 발달장애인 언니, 초등학생 딸을 부양하는 40대 여성에게는 생계의 터전인 서울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빈자(貧者)의 천국이었고, 지옥이었다. 대통령이 저 먹먹한 슬픔의 공간으로 몸을 밀어넣은 것은 국민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라는 무한책임과 연대의 증거다. 스스로 대통령다움을 입증한 것이다. 이로써 가진 자의 편에 선 오만한 선민(選民)이라는 부당한 편견에서 벗어났다.

반지하방은 톨스토이의 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의 구두수선공 마르틴이 신(神)을 만난 기적의 성소(聖所)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잃고 생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다 “내일 창밖 큰길을 보아라. 내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는 예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상으로 향한 창을 통해 보이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주시했지만 예수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추위 속에 청소하는 노인, 어린아이를 안고 추위에 떠는 여인, 사과를 훔치던 배고픈 아이를  들어오게 해 따뜻한 차와 음식을 대접했다. 어느날 밤 마르틴은 “보아라. 이것이 나다”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환대했던 세 사람이 차례로 나타났다. 신은 어느 시대에나 가장 약하고 슬픈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윤 대통령은 한겨울에 어머니가 사준 외투를 입고 나선 첫날 노점상에게 벗어준 대학생이었다. 그는 지금도 연민의 눈물이 어리지 않은 눈으로는 천국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외롭고 상처받은 지상의 신(神)을 만나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윤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겠다”고 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던 칼잡이의 호기가 아닌 제1 공복(公僕)의 겸손한 언어였다. 인사 실패와 국정 혼선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었다. 사전 각본이 없이 12개의 질문에 즉답했다. 국정 청사진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투박한 소신과 철학이 확인됐다. 비결은 장관들과의 끊임없는 토론과 소통에 있었다. 대통령의 일정에 밝은 관계자는 “늦은 저녁시간까지 보고를 받고 치열하게 토론한다”며 “장관 한 사람이 매주 한두 번씩 대통령과 독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청와대 홀로 독주하던 박근혜·문재인 대통령 시절과는 딴판으로 내각에 힘이 실리고 있다. 대통령의 정책 이해도 빠른 속도로 깊어지고 있다. 여의도 정치에 어두운 대통령은 오직 일로만 승부하려는 담백한 심정이다. 지금은 비록 도를 넘는 공격을 받아 악마화돼 있지만 그가 사익(私益)을 멀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대통령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김대기 비서실장의 불편한 직언도 주저없이 수용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파업사태의 경찰 투입 없는 해결, 김건희 여사의 절제 있는 행보는 그 결과였다.

문제는 여소야대의 불리한 구조다. 연금·노동·교육 개혁, 주택공급 대책, 대북정책, 한·일 관계 개선이 진전되려면 거대 야당의 협조가 필수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차기 당대표가 확실시되는 이재명 의원의 사법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전투모드에 들어갔다. 민생을 위해 전(前) 정권 사정과 여야 협력의 딜레마를 풀어야 한다. 대통령은 사흘 전 국회의장단과의 만찬에서 “여야가 힘을 합쳐 어려움을 이겨나가자”고 했다. 유일한 출구를 제대로 찾았다.

노무현 정부의 고건 초대 총리는 2003년 대통령 탈당으로 집권당이 두 동강 난 최악의 여소야대 사태가 벌어지자 4당 총무·원내대표를 설득해 국정협의회를 만들었다. 현직 총리의 체면과 의전을 포기하고 상임위·법사위·본회의장을 누비면서 여야 의원들과 소통하고 통사정했다. 이렇게 해서 태풍 복구 추경 3조원 예산안, 한·칠레 FTA 비준안, 이라크 추가 파병안을 처리했다. 똑같은 처지의 윤 대통령, 고 전 총리의 국무조정실장이었던 한덕수 현 총리에게 도움이 될 교훈이다.

윤 대통령은 초반에 지지율 추락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다운 태도로 전력을 다해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중이다. 내 편보다는 반대자의 의견을 더 경청해야 협치가 가능하고 국정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나’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러면 윤핵관 의존과 검찰·지인 편향도 줄어들 것이다.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지지도 받고, 모두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