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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불행의 ‘전시’ 넘어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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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진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뭐 줄 거예요? 불행을 전시하는 대가로.”

2017년 12월 서울역 앞에서 만난 노숙인 A 씨의 말이다. 입사를 앞둔 내게 주어진 미션은 혹한기를 견디는 노숙인 취재였다. 서울역 앞에서 그들에게 무작정 말을 걸었다. 공손한 인사 뒤에 질문은 ‘왜 노숙인이 되었는지’다. 사연을 듣는 대가로 담배 한 갑을 건넸다.

A 씨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회사가 부도나면서 거리에 나앉았다. 그 전까지 동대문 일대에서 의류 도매업을 하다가 한순간 덮쳐온 빚에 이혼하고 20년을 떠돌았다. A 씨의 설명엔 막힘이 없었고, 슬픔이나 후회 같은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껏 이런 기자가 족히 수십명은 됐기 때문이다. 그사이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페트병을 품에 안고 밤을 견뎌야 하는 그의 겨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반성컨대, 우리는 불행을 구경하는 데서 멈췄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사진 CJ ENM]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사진 CJ ENM]

최근 서울을 중심으로 내린 폭우로 반지하 주택에서 피해가 속출하면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반지하 대책’을 쏟아냈다. 조금씩 다르지만, 반지하를 점차 없애겠다는 게 핵심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반지하를 없애겠다”고 했다가 이후 “충분한 기간을 두고 줄여가겠다는 의미인데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논란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대책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반지하 침수가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반지하라는 주거 형태가 최근에서야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오스카상을 타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영화 ‘기생충’의 배경과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도 반지하였다. ‘BANJIHA’는 해외 언론에도 등장했다. 영화가 주목받으면서 봉 감독은 문재인 당시 대통령 초대로 청와대까지 방문했다.

한국도시연구소가 최근 펴낸 ‘생명권과 건강권을 위협받고 있는 지옥고(지하·옥탑·고시원) 실태’ 보고서를 보면, 2020년 지하에 거주하는 가구는 32만7000가구다. 2005년(58만7000가구)과 비교하면 줄긴 했지만, 지난해 제주도 전체 가구 수(27만1000가구)를 고려하면 여전히 적은 숫자가 아니다.

같은 기간 오피스텔을 제외한 ‘주택 이외의 거처’(고시원·비닐하우스·판잣집 등) 거주 가구는 5만7000에서 46만3000가구로 늘었다. 이 중 고시원이 40%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2018년 종로 고시원 화재로 7명이 사망했고, 지난해엔 서울 서대문구 옥탑에 살던 장애인이 폭염으로 사망했다.

반지하를 차차 줄여 없애겠다는 대책은 무척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기록적 폭우 직후 내놓을 만한 해결책은 아니다. 50년간 불가피한 선택지로 존속하던 것을 없애겠다고 발표하기까진 거주민들의 살 곳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했다. 그것 없인 반지하 앞에 쭈그려 앉아 불행을 구경하고 전시하는 일에 머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