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받더니 뒤통수 쳤다"…117만명 분노 부른 '尹 공약 후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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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경기 안양시 동안구 초원7단지 부영아파트에서 열린 '1기 신도시 노후아파트 현안 점검'을 마친 뒤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지난 5월 2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경기 안양시 동안구 초원7단지 부영아파트에서 열린 '1기 신도시 노후아파트 현안 점검'을 마친 뒤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아쉬울 때 구걸하듯이 표를 받아가놓고 이렇게 뒷통수를 친다면 전 정권 때와 다른 게 없다.”

정부가 1기 신도시 재건축을 위한 마스터플랜(종합계획) 수립 시점을 2024년으로 미룬다고 지난 16일 발표한 뒤 한 인터넷 부동산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약속한 것과 실제 발표된 내용이 다르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 1월 경기도를 찾아 “1기 신도시 재건축과 리모델링을 신속하게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런데 정부가 2024년에나 추진한다고 발표하자 1기 신도시 주민은 “공약 후퇴”라며 반발하고 있다.

병사월급 200만원, 여가부 폐지도 후퇴 논란

윤석열 정부의 공약 후퇴 또는 파기 논란 사례가 쌓이고 있다. 윤 대통령이 20대 남성 표를 얻기 위해 던졌던 병사 월급 200만원 공약도 그랬다. 윤 대통령은 후보 때 취임 즉시 병사 월급을 200만원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지난 5월 ‘취임 즉시’가 아니라 2025년까지 단계적으로 월급을 인상해 자산형성 프로그램 수익을 포함해 월 200만원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선심성 공약을 했다가 슬그머니 후퇴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추가경정예산안 신속 처리를 위한 국회 시정연설을 위해 지난 5월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 도착하고 있다. 오른쪽은 '병사월급 200만원 즉시 이행하라'라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추가경정예산안 신속 처리를 위한 국회 시정연설을 위해 지난 5월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 도착하고 있다. 오른쪽은 '병사월급 200만원 즉시 이행하라'라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여성가족부 폐지도 ‘남녀 갈라치기’ 비판 속에서도 윤 대통령이 밀어붙였던 공약이었지만, 인수위가 발표한 새 정부 국정과제에선 빠졌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18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업무보고에서 “현재 여가부의 틀로는 세대·젠더 갈등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며 여가부 폐지 의지를 재차 밝히긴 했다. 그러나 야당을 비롯해 반대 여론이 큰 상황에서 실질적인 폐지 움직임은 아직 없는 상태다.

대통령 세종 집무실 공약도 대통령실이 오는 10월 준공 예정인 정부 세종청사 중앙동에 제2집무실을 설치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공약 파기’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대통령실은 “공약 파기라고 하면 과한 것 같고 재조정 정도”라며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선심성 공약 이행의 딜레마

공약 후퇴·파기는 야당의 주요 공격 포인트다. 1기 신도시 공약 후퇴 논란이 커지자 더불어민주당 '1기 신도시 주거환경개선 특별위원회'는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선거철 표를 얻기 위해 117만 신도시 주민들을 기만한 것인가”라며 “윤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공약을 지킬 것인지 파기할 것인지 밝혀야 한다”고 질타했다. 민주당은 병사 월급 200만원, 세종 집무실 논란 때에도 ‘공약 후퇴’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현실에 맞지 않는 공약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게 맞냐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청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민의힘 위원은 “1기 신도시는 재건축 얘기가 나온 뒤로 집값이 급등하며 과열 조짐이 있었다. 너무 성급하게 재건축을 추진하면 더 과열될 수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보면서 추진하는 게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병사 월급 200만원도 전문가들은 당장 시행하면 재정 악화 등 부작용이 크다고 지적을 했다.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공동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 14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반대와 성평등 추진 체계 강화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공동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 회원들이 지난 4월 14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반대와 성평등 추진 체계 강화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에서 선심성 공약 이행 여부는 오랜 딜레마다. 당선을 위해선 선심성 공약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데 그 공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야당에 두들겨맞고, 그대로 이행하면 재정 낭비 등 부정적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람 이매뉴얼 시카고 전 시장은 자신의 저서에 “선거 때 내놓은 정책을 다 집행하면 미국은 확실히 망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갑작스럽게 상황이 바뀌면 공약은 지키지 않는 게 오히려 맞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약은 국민과 약속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대선 때 전문가들이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공약도 많았다. 그런데도 공약을 내놓고 지키지 않는다면 국민에게 사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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