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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 83m까지 내려가니, 못생긴 마음이 보이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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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호 26면

[스포츠 오디세이] 프리다이빙 대모 김선영씨

올해 1월 이집트 다합의 다이빙 포인트 일가든(Eel Garden)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있는 김선영씨를 프리다이버 사진작가가 찍은 장면. [사진 김선영]

올해 1월 이집트 다합의 다이빙 포인트 일가든(Eel Garden)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있는 김선영씨를 프리다이버 사진작가가 찍은 장면. [사진 김선영]

프리다이빙은 말 그대로 프리(free)한 다이빙이다. 공기통이나 장비의 도움 없이, 맨몸 또는 핀(오리발)만 차고, 깊은 숨 한 번만으로 바닷속 깊이 들어갔다 나온다. 자유롭지만 자유롭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종목이기도 하다.

김선영 씨는 국내 프리다이빙의 1세대 선구자다. 삶의 의미와 자유를 찾아 안정된 직장(음악 교사)에 사표를 던지고 프리다이빙을 쫓아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요가와 명상을 만났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책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든』(정신세계사)도 펴냈다.

2017년 4월 인터뷰 이후 5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낭랑한 소프라노 톤 목소리는 여전했으나 그는 훨씬 건강하고 안정돼 보였다.

5년 만의 재회입니다. 그 동안 무슨 일을 하셨는지요?
저희가 만났을 때가 세계여행 1년 차였는데요. 이후 여러 바다를 돌아다니고 대회에도 출전했죠. 4년쯤 됐을 때 한 곳에 정착하고 싶더라고요. 1년 내내 다이빙을 할 수 있는 곳, 요가와 명상도 하는 평화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시선을 좁히다 보니 이집트 시나이반도에서 홍해에 면한 다합이란 곳에 꽂혔어요. 해변에서 50m만 수영해 나가면 직벽으로 100m 이상 떨어지는 블루홀이 있어서 프리다이빙의 성지로 불립니다. 그 곳이 저의 놀이터가 되었죠.”

기록 욕심 앞서면 불행한 다이버 돼

다이빙 최고 기록도 바뀌었나요?
“그럼요. 5년 전 공식 최고 기록이 65m(비공식은 71m)였는데 어느새 83m에 가 있네요. 지난해 온두라스에서 열린 캐러비언컵 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세운 기록인데 AIDA(세계프리다이빙협회)에서 공식 인증했어요. 제가 월드 클래스에 비하면 베이비 수준인데 코로나 영향으로 그분들이 많이 못 나와서 운 좋게 1등을 한 겁니다. ‘평소 훈련한 만큼만 편하게 하자’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왔어요.”
83m 내려가니까 뭐가 있던가요.
“바다가 있었어요(웃음).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똑같은데, 자신과 더 깊이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기록은 단숨에 깨지는 게 아니고, 기록을 세우기 위해 테크닉을 연마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바다랑 점점 더 깊은 교감을 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서 편안해질수록 바다가 자신을 더 열어주는 것 같습니다.”
바닷속에 있으면 마냥 편안합니까.
“그럼요. 이젠 편안함을 넘어 경이로워지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인간이 어떻게 공기통이나 장비 없이 숨 한 번으로 그렇게 내려가는지 참 신기하거든요. 근데 내려갈수록 더 몸에 힘이 빠지고 ‘내려놓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83m 내려갔다 올라올 때까지 걸린 시간은 2분 23초였어요.”
숨 참는 시간도 계속 늘고 있나요.
“네. 지금은 6분 정도 참을 수 있어요. 명상 수련을 하고 나서는 숨을 참고 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편안해요. 명상을 하면 몸 안의 감각들을 바라볼 수 있는데 힘이 들어간 걸 알아차리고 그곳에 힘을 빼 줍니다. 그러면 시간이 더 늘어나죠.”
중앙일보S 스튜디오에서 김선영씨가 ‘인어공주 컨셉’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중앙일보S 스튜디오에서 김선영씨가 ‘인어공주 컨셉’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그동안 국내 프리다이빙 환경도 많이 변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프리다이빙 인구가 크게 늘고 있고, 다이빙 풀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국내 여성 프리다이버 1위인 김정아 선수는 지난해 7월 국제대회에서 CWTB(양쪽 발에 핀을 신고 하는 종목) 86m로 아시아신기록을 세웠다.

김정아 선수가 김선영 선수의 최고기록을 하나씩 깨고 있는데요.
“뿌듯하고 기쁘죠. 제가 국내 프리다이빙의 대모(大母)같은 역할인데, 저를 넘어서는 선수가 나온다는 거잖아요. 김정아 선수가 며칠 전 국제대회에서는 95m까지 내려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사실 국제대회 나가면 한국 선수는 저 혼자일 때가 많아서 외롭기도 했거든요. 일본 선수 여러 명이 출전해서 서로 응원하고 코치도 해 주는 모습이 부러웠는데, 이젠 우리도 그렇게 되겠구나 싶어요.”
잠수 중에 블랙 아웃(기절)이 온 적도 있었다면서요.
“내려가는 중에는 거의 없고, 올라오다가 당하는 경우가 있어요. 당시 저는 초보였고, 대회가 2시간 연기돼 당(糖)도 떨어졌고, 해파리에게 쏘이는 등 악재가 겹쳤어요. 무엇보다 기록에 욕심을 낸 게 화근이었죠. 18m 남기고 블랙 아웃을 당했는데 물속에서 선수를 지켜보는 안전요원 덕에 목숨을 건졌죠. 그 후 더 경각심을 갖고 안전하게 프리다이빙을 하면서 제2의 삶을 살고 있어요.”
초보자에게 안전 팁을 주신다면?
“프리다이빙에서 제일 중요한 룰은 ‘Never Freedive Alone’, 절대 혼자 하지 말라는 겁니다. 좀 더 깊이 내려가려고 웨이트(납덩이)를 차면 위험도는 배가 됩니다. 가끔 낚싯줄에 걸리는 사고도 일어나죠. 본인의 한계를 넘어가는 ‘빅 점프’는 지양해야 합니다. 사람 몸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1시간 전후가 다르니까 ‘이 정도는 언제든 할 수 있어’라는 자만은 절대 금물입니다.”
국내와 해외에서 추천할 만한 다이빙 포인트는?
“전 9~10월쯤 제주도 서귀포 문섬 바다가 참 따뜻하고 예뻤던 기억이 납니다. 해외에는 바하마의 롱아일랜드에 딘스 블루홀이 있어요. 해변에서 10m만 가면 200m가 넘는 싱크홀이 나타나는데 물 속에서 모래가 떨어지는 게 마치 심령술사가 연기를 풀어놓은 것처럼 신비롭고 미스터리했어요.”

프리다이빙 철칙 ‘절대 혼자 하지 말라’

프리다이빙도 올림픽 종목이 될 수 있을까요?
“조짐이 보입니다. 프리다이빙 강국인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이미 국가대표팀을 만들어 코치와 함께 움직이고 있어요. 다만 메이저 국제기구 간에 룰 조율이 먼저 이뤄져야 하고, 선수 안전과 대회 중계를 위해 질 높은 카메라가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 제 폴란드 친구가 수중 로봇에 관심이 많아서 중계용 로봇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100m가 넘는 깊이의 다이빙 영상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김선영 씨는 이집트 다합에서 셰어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프리다이빙을 배우기 위해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 묵는 숙소다. 그는 “어느 순간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기 시작했어요. 근데 우연히 여기서 함께 생활하는 친구들이 생기고, 아침에 밥 차려서 같이 먹고 하면서 처음으로 식구가 생긴 느낌이 들었어요”라며 웃었다.

그는 다합에서 프리다이빙과 요가를 가르친다. 바닷가 일몰과 함께하는 명상 모임도 이끌고 있다. 그는 “프리다이빙을 하면서 에고, 욕심, 내 못생긴 마음을 만났어요. 프리다이빙·요가·명상은 ‘몸을 통해 마음을 만난다’는 공통점이 있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행복한 프리다이버가 되기 위한 팁’을 툭 던졌다.

“가장 먼저,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프리다이빙을 왜 배우고 싶었는지’를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숨을 참고 내 몸을 바라보고 바다와 만나는 그 시간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바다를 무슨 전쟁터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있어요. 욕심이 날 때는 ‘바다가 좋아서, 예쁜 물고기 보고 싶어서, 거북이 보면 따라가고 싶어서 프리다이빙을 배웠는데 어느덧 만족을 못하는, 불행해지는 다이빙을 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려야 해요.”

고통받는 사람들, 용기 내서 행복해지도록 도와주고 싶어

지난 8일 저녁, 서울 마포구 양화진 앞 ‘수수책방’에서 김선영 씨의 북 토크가 열렸다.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든』을 펴낸 정신세계사가 독자 20명만을 초대한 자리였다.

기록적인 폭우를 뚫고 찾아온 열혈 독자들을 위해 김 작가는 기타를 잡고 ‘걱정말아요 그대’를 나즈막히 불러줬다. 책 소개와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질문 중에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게 많았다. 김 작가는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 뭘까? 그게 없어도 살 수 있을까? 그럼 샴푸·치약 같은 생필품이 없다면? 같은 질문을 던져보세요. 덜 쓰면 덜 필요하고, 그럼 덜 벌어도 됩니다”고 말했다.

지금 행복한 이유를 묻자 “그걸 알려면 다합에 오세요. 다합에서는 대화의 내용이 달라요. ‘오늘 다이빙 어땠어요? 고래 봤어요? 난 거북이 봤어요’ 같은 얘기만 해요. 서울에 오니 ‘주식이 올랐네, 비트코인이 떨어졌네’ 얘기만 들렸어요”라며 웃음을 지었다.

김 작가는 “삶이 뜻대로 안 돼 고통 받는 사람들이 용기 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고, 그걸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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