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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TSMC·마이크론 ‘퍼스트 무버’ 혈투, 각국도 총력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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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호 06면

글로벌 반도체 대전 격화 

232단. 지난달 미국 마이크론이 발표한 낸드플래시의 층수다. 메모리반도체 중에서도 저장장치인 낸드플래시는 통상 동일 면적에 더 높이 쌓을수록 성능이 향상된다. 그런데 마이크론은 지난해 176단 낸드플래시를 세상에 내놓으며 세계 최초 기록을 가져간 데 이어 올해 또다시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한주 뒤인 지난 4일 SK하이닉스에서 238단 낸드플래시를 내놓으며 이 기록을 다시 갈아치웠지만, 더는 미국 업체를 무시할 수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삼성전자가 ‘초격차’를 자랑했던 메모리반도체 D램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세계최초로 10나노미터(㎚)급 4세대 D램(1a D램)을 공개하며 치고 나간 바 있다. 마이크론의 역습을 받은 삼성전자 역시 가만히 있진 않았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하반기 1a D램 양산을 발표하며 맞불을 놨다. 다만 다음 단계인 5세대 D램(1b D램)은 기술적 장벽이 높아 기술 격차를 벌리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우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기술에서 앞서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을 선택할 고객 확보한 뒤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것”이라며 “다만 기술적 우위라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이미 공고한 시장 지배력에 균열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후발주자들 입장에서 세계 최초 마케팅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 마이크론 232단 낸드 기록 깨

삼성전자가 추격자인 시스템반도체 시장은 어떨까. 삼성전자는 고부가가치 분야인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마이크론과 똑같은 전략을 쓰고 있다. 지난달 25일 3㎚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 양산품을 세계 최초로 세상에 내놓으며 이 분야 세계 1위 기업인 대만 TSMC보다 기술적으로 앞섰음을 알린 것이다. 다만 삼성전자는 아직 3㎚ 공정 고객사 이름을 공개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최신 설비가 깔릴 평택 캠퍼스가 아닌 화성 캠퍼스에서 3㎚ 제품을 만든다는 점 때문에 실제 주문량은 많지 않을 것이란 게 반도체 업계의 분석이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삼성전자의 3㎚ GAA 공정 수율은 40%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며“다만 TSMC가 2㎚ 수준부터 GAA를 적용할 계획인 것을 감안하면 삼성전자가 미리 보약을 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혈투가 점입가경이다. 진원지는 미국이 주도하는 칩4 동맹이다. 한국과 미국, 대만, 일본을 동맹으로 묶어 반도체 공급망을 공고히 하려는 미국의 계획 안에서 합종연횡이 빈번해지며 경쟁 구도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곳은 반도체 제조 분야에선 낙오한 것으로 여겨졌던 일본이다.

일본 정부는 대만 TSMC와 손잡고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반도체 연구개발(R&D) 센터를 열었다. 최근에는 2024년 가동을 목표로 구마모토현에 TSMC와 소니, 덴소 등이 공동 운영할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지난 29일에는 미국 정부와 차세대 반도체 공동 연구센터를 연내 일본에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계획대로 된다면 2025년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 외에도 일본이 경쟁하는 구도가 조성된다. 칩4 동맹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일본 내부의 평가다. 나카야마 아쓰시 니혼게이자이신문 전문 논설위원은 칼럼을 통해“TSMC의 일본 구마모토현 공장 신설은 미국이 TSMC의 생산능력 일부를 대만에서 일본으로 피난시킨 것”이라고 전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는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미국의 중국 봉쇄가 가시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스템반도체를 중심으로 중국을 포위하던 미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제재에 들어갈 태세다. 지난 2일 로이터는 미국 정부가 중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에 반도체 제조 장비나 재료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반도체 업체 YMTC가 어느새 기술을 확보하며 연내 192단 낸드플래시 양산에 나선다고 발표하자 견제에 들어간 것이다. YMTC는 232단 낸드플래시의 연말 양산 목표도 내놨다.

미국의 추가 제재가 현실화되면 중국에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 기업도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공장 2곳을 가동하고 있고, SK하이닉스 역시 인텔의 중국 낸드플래시 사업을 인수해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중국이 YMTC를 필두로 메모리반도체 자체 조달에 나설지 모른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 수출의 60%를 담당하는 최대 고객이란 점에서 한국은 주요 시장 상실 위기를 맞게 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만 중국을 견제하던 미국이 메모리반도체까지 규제하고, 한국이 메모리반도체 주도권을 빼앗기면 한국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존재감을 잃는다”고 말했다

현재 반도체 대전의 특징은 각국 정부가 총력전을 펼친다는 점이다. TSMC 지원에 사활을 거는 대만, 반도체 굴기에 필사적인 중국, 미국의 손을 붙잡은 일본, 그리고 미국은 칩4동맹을 열심히 엮고 있다. 미국은 최근 반도체 지원법(칩스포아메리카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결국 한국만 개별 기업에 반도체 전쟁을 맡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메모리반도체 주도권 빼앗기면 안 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 사이에선 국가적 총력 지원 체제 구축이 시급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김용석 성균관대 교수(전자전기공학부, 반도체공학회 부회장)는 “한국반도체가 위급한 상황이니 만큼 조속히 대통령 직속 특위를 구성해 행정부 전반이 나설 수 있는 지원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과거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시장에서 밀려난 진짜 원인은 투자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반도체 산업은 설비 투자 비용이 막대한 산업인데, 버블 경제가 무너진 이후 일본 기업들은 빚 갚기에 급급한 나머지 신규 투자를 못 하다가 시장에서 밀려난 것이기에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반도체 시장 경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첨단 공정을 선점한 뒤, 품질 및 가격경쟁력 인정받아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지금까지의 경쟁 전략으론 더 이상 우위를 확보하기 쉽지 않단 얘기다. 시작 단계인 첨단 공정 개발부터가 기술적 한계점에 근접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선 1b 공정 수준 아래로 회로 폭을 미세화하기가 쉽지 않은데, 파운드리 시장에서도 2㎚ 공정 이후에는 1.8㎚와 1.4㎚ 순으로 미세화 공정 격차가 둔화될 것이란 게 반도체 업계의 전망이다.

이에 반도체 업계에선 시스템반도체와 메모리반도체를 붙여서 토탈 솔루션을 제시하는 식으로 성능 경쟁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가 시스템메모리에선 TSMC에 밀려 2위지만, TSMC는 메모리반도체를 만들지 않는 만큼 종합반도체 기업으로 삼성전자의 강점을 살려야 한다는 얘기다. 삼성전자 역시 이 같은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기존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미세 공정 차별화의 효과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며 “이제 산업 중심이 데이터 중심으로 바뀔텐데, 메모리반도체가 단순 저장장치 역할에 멈추면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다양한 기능을 수용할 수 있는 차세대 메모리반도체가 중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성환 카이스트 반도체시스템공학과 학과장은 “메모리 코어에 인공지능 엔진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메모리 내부에서 일부 연산처리를 가능케 하는 핌(Processing-in-Memory)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선두에 있는 한국기업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라며 “한창 개발중인 분야지만 시장을 확보한다면 다른 기업들이 따라붙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4세대 D램(1a D램)=반도체 회로 선폭이 10㎚대 미만에서 제작되는 D램. 메모리반도체 업체들은 20㎚ 미만 공정에 접어든 2016년 이후로는 구체적인 수치를 공개하는 대신 1의 자리 숫자에 알파벳을 대입해 1x, 1y,1z, 1a와 같은 형식으로 기술적 우위를 표시하고 있다.

게이트올어라운드(GAA)=반도체 회로 선폭이 미세화되면서 전류 누설이 문제가 되자 이를 막기 위해 개발된 기술. 게이트로 감싼다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전류가 흐르는 채널의 4면을 게이트로 활용한다. 기존의 핀펫(FinFET) 공정에선 앞면과 뒷면, 윗면 등 3면을 이용한다.

통합 솔루션 반도체=데이터 연산 기능은 중앙처리장치(CPU)나 어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에서 담당하고, 데이터 저장 기능은 메모리반도체가 담당하는 식으로 구분하던 기존 반도체와 달리 하나의 제품에 여러 기능을 포함하는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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